무려 10개월 근속이라니!
아내와 아이들보다 나흘이나 앞서 내가 제주에 먼저 가 있던 건, 지난 10개월 동안의 회사 생활에 대한 보상과 올해 이후 생활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 일로 엮이지 않는다면 좋을 사람, 어떻게든 다시는 만나지 않길 바라게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1년 가까이 구성원의 일부로 생활했으니 그 정도의 호사는 누릴만하다고 아내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가족을 이루고 있는 40대 후반의 남성이 쉽게 들을 법한 치사는 아니었다.
가장 치열하게 가장 악착같이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연령대지만, 나는 누가 봐도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하지만, 누군들 아니겠는가. 남의 돈이 아쉬우니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거지. 다만, 나는 회사에 적을 두지 않고도 20년 가까이 남의 돈을 받아왔다.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단단히 뿌리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덕분에 나는 모은 건 별로 없고 나갈 구멍만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어떻게든 이어지던 일들이 작년을 기점으로 뚝 끊겨버렸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한 해 회사라는 곳에 다녔던 건 생존을 위함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렇게 왕복 1시간 30분을 출퇴근에 소요하며 지낸 2025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10개월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간혹 기대보다 좋았던 순간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내 성격상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결의를 확고히 한 후 도생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을 벗어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아내에게 전했고, 언제나 대인의 풍모로 남편을 보듬는 아내는 내게 “먼저 제주에 가 원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등을 두드렸다.
제주는 1년 만이었다. 지난해, 20년 만의 회사생활을 앞두고 나 혼자 각각 6학년과 4학년이 될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에 도착한 게 2025년 2월이었다. 그때 우리 삼부자는 평소보다 많이 걷고 평소보다 많이 이야기하고 평소보다 많이 먹는 3박 4일을 보냈다. 소박한 숙소와 소박한 식사들이었지만, 모두에게 재미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혼자 도착했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은 제주에 몰입되지 않았다.
제주가 지루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곳에 살고 있다면 모를까, 여행자에게 제주는 언제나 흥미롭거나 안락하기 마련이니까. 그저 내 마음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래서 걷기로 했다. 숙소에서부터 걸어 시작할 수 있는 올레길을 검색하다 보니 18코스가 좋겠다 싶었다. 제주에 도착한 둘째 날,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