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먼저 떠난 3박 4일 여행(2)

걷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by 정환정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서 현무암을 잘라 조성한 인도를 걷기 시작하자 제주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으로부터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따라 비행기 매연 냄새가 느껴질 때마다 제주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온통 갈치와 흑돼지로 가득 찬 간판들을 지나며 제주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걸음마다 제주를 채워 넣으며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오른쪽 허벅지가 아프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허벅지의 바깥쪽이었다.


오랜만의 장거리 도보라 생기는 자연스러운 통증이라 생각했다. 다만 한쪽 다리에만 통증이 생기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걸음걸이를 좀 더 정확히, 균형을 맞추어 걷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허벅지 바깥쪽에도 통증이 생겼다. 어쩐지 만족스럽고 안심이 됐다.


그렇게 아픈 다리로 사라봉을 지나자 제주항 제10부두가 보이는 숲 산책로에 이르렀다. 잠시 쉴까 싶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걷는 길이니 제대로 걸어 보자는 괜한 오기가 차 올랐다. 아픈 거야 근육인 거고, 파열되지 않는 한 며칠 후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길을 시작하며 아내에게는 삼양해수욕장까지 걷겠다 이야기를 해놓았다. 아내는 그런 약속에는 큰 의미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일이지, 누가 상이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그렇게 해서 패배하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니 더하고 빼면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일에 몸이나 마음이 다치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 했다.


BandiView_DSC02683.jpg 오랜만의 도보 여행자에게 올레18코스는 꽤 훌륭한 경관을 선사해줬다.


나 역시 외골수는 아니기에 정해진 올레길대로만 걷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지름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래봤자 줄어든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을 게 틀림없었지만, 그마저도 어쩐지 내가 약해진 흔적을 남기는 일 같아 속이 편하질 않았다.


질러 걷는다 해서 몸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양쪽 허벅지는 계속 아팠다. 하지만 쉬는 것도 싫었다. 쉬어봤자 아플 거,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후 점심 식사를 위해 버스를 타고 제주 시내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이 역시 효율성과 합리성에 기댄 이성적 판단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저 멀리 삼양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참이었다. 무릎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굽히지도 못한 채 양발을 질질 끌다시피 걷던 나는, 다리를 한 번씩 털어주고 조금 빨리 걷기 시작했다.


검은 모래와 하얀 파도, 짙푸른 바다가 저마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삼양해수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젖은 모래를 밟으며 걷고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눈에 힘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바지를 벗고 팬티 바람으로 포말을 향해 걸어가는 어떤 청년의 선명하게 빛나는 뒷모습을 보고 환각이나 환상의 가능성을 거두었다.


오랜만의 바닷바람이었다. 바닷마을에 살고 있지만, 우리 동네의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바람에 제주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제주 시내로 돌아오는 길엔, 몇몇 단어를 제외하면 알아들을 수 없는 동사와 접속사로 이루어진 버스 정류장 할머니들의 대화로 제주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식뷔페 급수대 옆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작고 못생긴, 하지만 사 먹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당도를 자랑하는 귤들 덕분에 제주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 새로워졌다고 다리까지 새로워진 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좀 나아졌다는 생각에 다시 숙소까지한 시간 반을 걸었으니 회복은 언감생심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들른 커다란 하나로마트 구경도 포함됐다. 그나마 하나로마트 안에서는 잠깐 앉아 쉬기도 했다. 십 분 정도 앉으면 삼십 분 정도는 더 걸을 만했다. 버스정류장의 온열 벤치는 마치 생명력 충전소 같았다.


꾸역꾸역 숙소로 돌아와 스트레칭과 마사지로 다리를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물론 안 하는 거보다야 나은 일이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서 미리 봐두었던 목욕탕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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