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먼저 떠난 3박 4일 여행(3)

물 맑은 목욕탕이 거기 있었다

by 정환정

사람마다 여행에 있어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누군가는 음식이겠고 누군가는 절경이겠으며 누군가는 좋은 숙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온천 혹은 목욕탕이다. 낯선 지역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기에 그곳들만큼 극적인 곳도 또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온탕이 아닌 열탕 혹은 한증막에서 삶고 지지는 걸 좋아하던 내 취향이 적극 반영된 선택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만의 제주 여행 계획을 세우며 당연히 온천과 목욕탕을 코스에 넣었다. 제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첫손에 꼽을 만한 산방산탄산온천은 아이들과, 연동에서 오랫동안 영업을 이어온 한 동네 목욕탕은 혼자 다녀 올 요량이었다. 모처럼 오랫동안 올레길을 걸을 계획을 세웠으니, 숙소 근처에서 몸을 풀어주는 건 당연한 수순.


제주에 도착한 다음 날, 숙소를 나선 지 6시간 30분이 흐른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목적지였던 삼양해수욕장에서 식당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던 동안을 제외하면 내내 걷는 시간이었다. 짧지 않은 여정이었기에, 게다가 허벅지가 욱신거렸기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탕에 들어가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다리를 절름거리며, 중간에 걷기를 그만두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지 않았음을 자책하며 목욕탕에 도착하니, 그 분위기가 실로 남달랐다.


건물은 총 3층으로 보였다. 목욕탕 바로 앞에는 예닐곱 대의 승용차들이 서 있었는데, 모두 목욕객들이 몰고 온 것들이었다. 덕분에 입구로 들어서는 길은 몹시 비좁아, 나는 아픈 다리를 총총거려야 했다. 당연히 짜증이 났지만 그와 함께 기대감도 커졌다. 중후장대한 사우나들이 저마다 휘황찬란한 시설을 자랑하는 요즘, 족히 40년은 됐을 법한 이 목욕탕은 무엇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대여섯 개의 계단을 오르자, 정면에는 하늘색 페인트를 바른 판자가 보였다. 판자는 가로세로 대략 1m 정도로 뚫어놓았는데, 그 안으로는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거기에는 이제 막 건조된 것으로 보이는 흰색 수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주인집 딸이 아닐까 싶은 20대 후반 정도의 여자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일반 신용카드 결제를 한 후에야 탐나는전 결제와 적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역시나 친절하게 원래의 결제를 취소하고 재결제를 해줬다. 아직 탈의실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가벼워졌다.


2층 남탕에 이르러 간유리를 끼워 넣은 미닫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족히 40년’으로 가늠했던 목욕탕 역사의 시점을 20년은 더 뒤로 미뤄야 했다. 얇은 합판으로 짜맞춘 후 나무무늬 코팅지로 마감한 옛날 사물함은, 2000년대 초반 문을 닫았던 돈암동의 내 단골 목욕탕을 떠올리게 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60년대 후반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목욕탕.jpg 2007년 문을 닫은 돈암동의 신안탕 입구


하지만 그 목욕탕에서는, 제주 연동처럼 많은 수의 목욕바구니를 볼 수 없었다. 내가 오늘 방문한 목욕탕의 사물함 위쪽은, 입구의 자동차들보다 훨씬 더 높은 밀도로 많은 수의 목욕바구니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개 이상은 될법했다. 오랜 세월,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탈의실에 들어설 때부터 들리던 진공청소기 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번쩍이는 은색 업소용 진공청소기를 운전하고 있는 이는 무척이나 날랜 동작으로,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수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래된 목욕탕의 상징인 평상 아래를 청소하느랴 거의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낮추고 청소기의 헤드를 이리저리 놀리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목욕탕의 영업시간은 오후 7시 30분까지. 오후 6시 30분 이후로는 입장을 금지한다는 안내문구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을 때는 겨우 오후 5시 무렵. 마감 청소를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지 않나 싶었지만, 궁금증을 해소하기보다는 탕에 몸을 담그는 게 먼저였다.


목욕탕 내부는 무척이나 단출했다. 탕은 겨우 세 개밖에 없었다. 그나마 온탕이 하나, 냉탕과 폭포탕이 각 하나씩이었으니, 수온에 민감한 이들에게는 난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샤워를 하고 몸을 담그니, 수십 년 동안 온탕 하나로 이만큼의 단골을 거느리는 이 목욕탕의 연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40도를 조금 넘는 수온을 좋아한다. 물론 목욕탕마다 수온계의 영점이 동일하지 않아 최소 1도 이상의 오차가 있지만, 어쨌든 41도 정도면 몸이 데워지는 느낌이 들어 근육이 이완된다. 그런데 이 목욕탕은 내가 선호하는 수온에,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함이 더해졌다. 이 정도면 우리집 어린이들도 충분히 들어올 만하다 싶었다. 그러니까, 열탕을 선호하는 사람과 온탕에만 들어가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탕이라는 의미다.


전신을 푹 담그고 어떻게 이런 운용이 가능한지 이유를 생각해 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여섯 명이 들어앉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탕에 무척이나 강력한 기포발생기였다. 끊임없이 풍부하게 솟아오르는 기포들은 몸에 닿는 물의 온도를 원래의 것보다 낮게 만들 게 틀림없었다.


탕의 온도가 높다 생각한다면 기포가 많은 쪽에, 적당하다 생각한다면 가장자리에 머물면 된다. 손님들이 가장 선호하는 수온에 대해서야 수십 년 동안 쌓은 데이터를 통해 결정됐을 테니, 탕 안에서 움직이며 자신에게 맞는 온도를 찾으면 되는 시스템이 아닌가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좀 더 오래 앉아 있다 보니, 가장 큰 요인은 수질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물이 맑았다. 게다가 탕의 아랫부분에서는 쉴 틈 없이 강한 물줄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오후 늦게 입장하면 탕 속의 물이 미끈거리는 통영 어느 목욕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 목욕탕들은 물이 맑은 곳들이 꽤 많다. 제주 시내에서는 아스타 호텔 지하 사우나가 특히 그랬다. 게다가, 피부가 얼얼할 정도의 그 화끈함이라니. 삼다수의 고장이라는 점이 목욕탕의 가치를 올리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무척이나 흡족해졌다. 만족감이 뜨겁게 온몸을 감쌌다. 바닷물을 정화해 사용한다는 통영 목욕탕의 그것보다 훨씬 차가운 냉탕에도 몇 번이나 들어갔다. 역시 물이 좋았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목욕탕 안도 상쾌했다. 물비린내나 하수구 냄새, 지린내 같은 건 일절 맡을 수 없었다. 이토록 오래된 공간이, 이토록 많은 습기에도 악취나 물 때 하나 없이 유지되는 게 신기했다.


그때, 아까 탈의실에서 청소기를 돌리던 아저씨가 목욕탕에 들어섰다. 팬티바람이었다. 청소를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청소도구들을 꺼내더니 이곳저곳을 날랜 몸놀림으로 바쁘게 오갔다. 바깥에서 청소기와 함께할 때와 마찬가지의 분위기였다. 좀 이른 마감청소구나, 생각하며 다시 온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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