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맑은 목욕탕 탈출기
온탕에서 본격적으로 몸이 녹아내릴 무렵, 팬티바람 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닥에 길게 이어진 배수구 뚜껑을 열기 위해 목욕탕 중앙을 바쁘게 오갔기 때문이다. 보통은 바닥에 솔질만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아저씨는 뚜껑을 열고 물이 지나는 길을 작은 솔로 꼼꼼히 닦았다.
이번엔 입식 샤워기 쪽으로 가 세제가 담긴 통에 큰 솔을 담갔다. 금세 꺼내지 않고 속으로 숫자를 세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잠깐 서 있더니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거울 네 개를 왼쪽 세로, 오른쪽 세로, 이후 가로로 벅벅 닦았다. 그러고는 온탕의 물을 힘차게 퍼내 좍좍 뿌렸다.
그리고 문득 대걸레를 꺼내 들고 온탕에서 퍼낸 물을 잔뜩 먹이더니, 제대로 짜지도 않고 탈의실로 갖고 나갔다. 뭘 하려는 건가 궁금해 그 뒤를 좇는 내 시선 속으로 한 무더기의 흰색 수건들이 들어왔다. 아저씨는, 사용 후 바구니에 모아놓은 하얀 수건을 바닥에 쏟아내고 그 위에 젖은 대걸레를 얹은 후 힘차게 탈의실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런 물걸레질, 아니 물수건질이라니!
다시 목욕탕 안으로 들어온 아저씨는, 이번엔 입식 샤워기 부근에 놓아둔 샤워수건 수거바구니를 온탕 근처로 끌고 갔다. 그리고 양동이 안에 뭉쳐놓은 비누를 퍼내 샤워수건을 손으로 빨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온탕 물로 헹구고는 입식 샤워기 부근 거치대에 걸어뒀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이번엔 녹색 수세미를 꺼내 들더니 온탕과 냉탕의 가장자리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물때를 없애는 데에 사용한 수세미를 여전히 물이 찰랑거리는, 그리고 여러 사람이 이용할 온탕과 냉탕에 넣고 헹궜다.
내가 본 아저씨의 마지막 과정은 바닥 청소였다. 조금 아까 거울을 닦았던 솔에 세제를 먹여 입식 샤워기 아래 타일바닥을 박력 있게 문질렀다. 바닥이 온통 세제거품으로 뒤덮인 입식 샤워기를 이용하기엔 애매해졌다. 어쩌면 아저씨의 정열이, 의지가, 투혼이 서린 곳에 가기 꺼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좌식 샤워기에 앉아 머리를 감고 비누칠을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바닥 청소를 끝낸 아저씨가 내 쪽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다. 내가 앉은 라인에는 나 혼자뿐이었으니, 내가 없었으면 그쪽의 바닥 청소가 시작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미 샴푸는 이미 내 머리에 거품을 잔뜩 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움직일 수도 없었거니와, 자리를 옮긴다 한들 입식 샤워기 쪽 바닥은 여전히 세제투성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나와 세 칸 떨어진 라인의 끝에 앉더니 물바가지들을 한 데 모아 그것들을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박박 닦기 시작했다. 비록 거품이 가리고 있었지만, 잠깐씩의 곁눈질로도 동작에 절도와 기백이 넘침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압박감이 생겼다. 난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몸을 씻고 바깥으로 나갔다.
탈의실에서는 이마가 넓게 벗겨진 할아버지와 손자가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손자는 아까부터 먼저 나와 물기를 닦고 패딩점퍼까지 모두 입은 상태였다. 손자를 씻기느라 늦어졌을 게 틀림없는 할아버지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나온 참이었다. 손자의 머리가 아직 젖어 있는 걸 보고 드라이기를 들고 직접 말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년쯤 초등학생이 되지 않을까 싶은 손자는 “뜨거, 뜨거” 하면서도 잘 참았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대견했다. 할아버지도 그랬는지, 작게 껄껄 웃었다.
손자의 머리가 다 마르자, 이마가 넓은 할아버지는 검게 펄럭이는 뭔가를 들고 드라이기를 말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가발이었다. 가발은 저렇게 빠는구나, 아니 감는구나. 난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얼른 자리를 옮겨야겠다 생각했다. 누군가의 인격 혹은 존엄과 직결된 물건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루는 걸 목격한 게 아무래도 거북했다.
그때 목욕탕 쪽 문이 열리며 60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어흐” 하는 감탄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까, 냉탕의 난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더니 그 끝부분을 코에 갖다 댄 후 힘차게 “푸흐응” 하고 콧물을 풀었다. 그리고 조금 아까 탈의실 바닥을 닦고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는 수건들 위에 던졌다.
더 이상 목욕탕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아픈 다리를 이쪽저쪽 들어 바지를 꿰어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내 몸은, 그곳에 들어가기 전보다 분명히 깨끗해졌다. 그 목욕탕을 찾는 모든 사람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을 게 틀림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순대국을 저녁으로 사 먹었다. 아까의 목욕탕 청소가 그러했듯, 조금 이른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많이 걷고 목욕까지 한 덕분에 시장기가 일찍 찾아온 탓이기도 했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서기도 귀찮았던 이유가 더 컸다.
뜨거운 순대국을 먹다 보니 땀이 제법 솟았다. 애초에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상쾌한 땀처럼 느껴졌다. 숙소에 들어가면 그대로 샤워를 하고 싶은 맘이 들게 만드는 좋은 땀이었다. 한 시간 동안 물 맑은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음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