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살기로 했다.

제1부 고요히 서 뿌리내린다.

by 순아

이런 생활을 한지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간다.

하루의 시작은 여느 전업 주부의 일과와 비슷하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운동을 하거나 여행이나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생활의 활동 반경이 제약적이다.


아이들 키울 때는 비틀어져 가는 나무처럼 살아도 내가 나무의 시간을 보내는조차도 몰랐다.

아니 몰랐는 게 아니라 생각조차 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맞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집안 일 하는 것조차

벅찼었다.

그때는 끼니때마다 내 손으로 아이들 밥만 해줄 수 있어도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정도였다.

한 번씩 찾아오는 심한 어지럼증과 실신 후유증으로 며칠씩

약을 먹고 누워 있었던 날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심한 어지럼증에 대한 불안감과 하루 빨리 이 고통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했었다.

다행히 완치는 아니지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로 지금은 그런 증세가 거의 없어졌지만, 정상인처럼 활동은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독립해서 다 떠난 시간.

거의 집안에만 있다보니 활동이라곤 가끔 병원이나 꼭 필요한 외출만 한다.

나의 하루하루를 가만히 지켜보면 나무와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예전에 비하면 나무처럼 사는 삶이라는 걸 인식하는 것 그 자체로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이란 요사스러워 sns에 올라오는 친구와 지인들의 여행사진이나 적극적인 모임활동 등 화려한 일상을 보면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남편뿐인 내 삶이 지루하고 권태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 남은 생을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한동안 남들은 다 하는 걸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결핍에

마음을 두니 내 삶이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손에 닿지 않는 것만으로도 크게 보이는 욕망의 확대효과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평소 객지에 나가 있는 아이들과 친구나 자매들이 수시로 전화가 온다.

내용은 주로 사회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나 집안에 힘든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런 날이 반복될수록 '내가 사람들의감정쓰레기통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주 전화 오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그들이 마치 나무에 수시로 찾아와 시끄럽게 울어대다 똥을 싸 놓고 휙 날아가는 각종 새들 같았다.


그러다 닥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책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주체는 결국 자기 자신이다.
각자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글귀를 보고 나의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질문해 보았다.

꼭 적극적인 행위를 해야만 가치 있는 삶인 것인가?

<화>의 저자 틱낫한 스님은

행위의 질은 전적으로 존재의 질에 달려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유로운 행위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존재의 질을 높여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가 되기로 했다. 이런 나무가

뿌리는 깊고 튼튼하게 내리고

껍질이 벗겨져도 더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내는 굴참나무처럼

때가 되면 속이 꽉찬 실한 열매를 맺어

세상에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나무




혼자서 집에 있는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마음껏 읽고 싶은 책도 읽고, 글쓰기와 유튜브도 만든다.

다행히 요즘은 집에서도 할 게 참 많은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지인들의 전화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간접경험하는 좋은 통로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료한 나무에게 다양한 소식을 전해주는 새들처럼.

지인들이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쉬다갈 수 있는

넉넉한 나무가 되기로 했다.


새 , 구름 ,바람, 눈, 비, 사람들 그리고 해, 달, 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나만의 나무 세상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