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근데 진짜 이유가 뭐예요?
왜?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일단 이 '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일의 배경을 살피고 과정을 파악하고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흔히 why를 다섯 번 물으면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술래잡기는 그래서 강한 스토리를 부여한다. 비폭력을 외치며 물레질을 하던 마하트마 간디부터 파산한 집을 위해 랩머니를 버는 Dok2의 '왜'는 대중을 감화시킨다.
문제는 왜가 불분명할 때 생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이 생각하는 그것과 스스로가 다를 때 미묘한 노이즈가 발생한다. 말 언저리를 몇 번 돌기가 지루할 쯤 진짜 궁금증을 던진다. 예를 들면 "아니 근데 진짜 헤어진 이유가 뭐야?" "그래서 그만 둔 이유가 뭐예요?" 원하는 답이 있건 없건 '왜'라는 철저한 검증과정에서 본인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명확한 이유가 없어도 답을 짜내야 하는 상황은 괴롭다.
1년 전, 나는 퇴사했다. 근무조건, 조직문화에 아쉬운 점도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라 딱 한 가지 이유나 동기를 대기가 어렵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결정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다만 어떤 조직에서 제 발로 걸어나온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정신적 대미지가 제법 컸다. 자유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동네 후배가 알려준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올랐다. 2주 후 난생 처음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40일간의 여정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 많은 질문을 받았다. 특히 "순례길 어땠어? 좋았어?"라는 질문 이 많았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좋았다'로 함축하기엔 수많은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심 있는 상대방과는 5일 차에 만난 구성애 선생님과 저녁식사, 교토대학원생 야스오와 인터뷰 등 에피소드를 나눴지만 정반대는 간단했다. "응, 좋았어."
산티아고 이야기와 별개로 나는 다시 구직시장에 뛰어들었다. 면접관, 소개팅녀 등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왜 그만두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산티아고 후기를 딱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렵듯 이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말이 길어지기 일쑤였고 결국 정형화된 답을 찾았다. "다른 것 해보고 싶어서요." "근무패턴이 불규칙해 애로사항이 있어서요." 혹은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퇴사를 한 나에겐 '왜 그만두었냐'는 타인의 물음표와 비슷한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녔다.
물음표가 꼬리표로 변하는 몇 번의 경험으로 'why'가 꽤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파고드는 크 습성이 타인의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혼한 사람에게 이혼사유를 묻는 것과 같은 질문 말이다. 특히 한국처럼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는' 분위기에서 내 진심은 중요치 않다. '너한테도 문제가 있으니 헤어진 거 아니야?'라는 의도가 아니라 한들 대답은 피곤하다. 그 후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조심스럽게 왜를 던지거나 그냥 참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종종 상대방이 왜를 풀어놓는 경우가 있었다.
"저 같으면 그냥 몇 년 버티다가 이직할 것 같은데 아깝네요." 취업스터디에서 본 초면의 남자(새 X)가 대답했다. 연봉은 얼마였는지 퇴직 사유는 뭐였는지 훅훅 들어오는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뭐 각자의 인생이 있듯이 개인의 선택이죠. 하하"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페이스는 왜 그렇게 비대칭인지, 치아는 왜 밖을 갈구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연의 선택과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없기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후배인 그와 스터디룸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