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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ight Oct 05. 2015

내 인생 마지막 순간

그때가 생각나요. 장바구니를 들고 가다 멈춘 당신의 모습을요. 하얀색 니트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훈남을 누가 쳐다보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죠. 3초간 눈이 마주치면 인연이라는데,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당신과 앉아있던 서로를 빤히 쳐다봤어요.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기 시작했죠.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죠.


처음이었어요. 낯선 남자의 향기를 맡은 건 말이죠. 남자 혼자 사는 집은 더럽다는데, 깔끔한 방이며 깨끗한 화장실까지 정말 놀랐다니까요. 긴장해서 몸을 떠는 날보고 재훈재훈을 따라하던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개그맨인 줄 알았어요. 깔끔하지만 깐깐하지 않고, 장난기 많지만 가볍지 않은 당신을 보며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 순간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네요.


내가 심하게 아팠던 그날 기억나요? 저녁에 먹은 밥이 이상했던 건지, 아니면 간식이 이상했던 건지 이유 없이 토하기 시작했죠. 밤 열두 시가 넘어 동네 병원문은 모두 닫았죠. 날 안고 응급실로 달려간 탓에 당신 티셔츠가 흠뻑 젖었죠. 그렇게 급하게 도착한 응급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단순 과식이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창피하던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안심하는 당신 얼굴을 보았어요.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단 사실에 아픈데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이런 감정,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겠죠.


우리가 함께 한지 벌써 15년이 흘렀으니,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네요. 목욕하고 팬티만 걸치고 나오는 당신 모습 제가 못 보는 것 같죠? 사실 다 보고 있었어요.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매일 저녁 달리던 공원의 산책길도, 주말이면 갔던 카페도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마세요. 우느라 퉁퉁부은 눈이 잘생긴 얼굴을 망치잖아요. 내 생에 첫 사람이 당신이었듯 끝사랑도 언제나 당신뿐이랍니다. 점점 눈이 감기네요. 의사 선생님이 주사를 놓기 시작했나 봐요. 이제 당신의 ‘예삐’를 놓아주세요. 그리고 다음 생에는 우리 같은 사람으로 만나요. 안녕 나의 사랑, 나의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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