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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ight Oct 04. 2015

마지노선

당신 인생의 빨간선

창구 너머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까부터 뚱한 표정이 이제는 찌그러진 찐빵같이 변했다. 100만 원 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냐는 물음에 딱 잘라 거절을 했다. 이런 사람일수록 딱 잘라 말해야 한다는 부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버튼을 눌러 다음 손님을 받았다. 창업을 하려는데 돈이 모자란다고 대출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신용을 보니 비 정규직에 이미 대출이력도 여러 번이다. 애써 웃으면서 대출이 불가능한 이유를 말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만 다섯 번째 거절이다. 


10년 전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진학을 앞 두고 담임과 면담할 기회가 생겼다. 계산이 빠르고 숫자를 잘 다뤘던 난 A은행을 가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담임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교무실이 가득 찰 정도로 그가 웃기 시작했다. 너 같은 놈이 어딜 가냐고 일장연설을 하더니 서랍 안에서 커피포트를 꺼냈다. 커피 포트에는 100ML마다 빨간색 눈금이 표시돼 있었다. 웃음이 가시지 않은 그가 검지 손가락으로 50ML를 가리켰다. “이게 네 인생 성공의 마지노선이다. 알겠냐?”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떨궜다. 


그 날 이후로 죽도록 노력했다. 20등이었던 반 등수는 전교 5등으로 올랐다. 때마침 정부에서 고졸 채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정책을 펼쳐서 기업 문도 넓어졌다. 서류합격, 면접전형 합격 그리고 최종 합격을 거쳐 A은행에 들어갔다. 채용이 결정되던 순간 담임을 찾아가서 당신이 있었기에 합격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무안한 웃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당신이 정해놓은 마지노선을 내가 깨트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순두부찌개를 점심으로 먹고 다시 대출창구에 앉았다. 대기번호표를 간절하게 쥐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파마머리를 한 20대 젊은 남성, 가짜 루이뷔통 백을 들고 있는 50대 아주머니 등 참 다양한 사람들이다. 매일 그들에게 안된다고 말하는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악덕한 은행 직원?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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