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공간은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감정과 기억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치유의 힘을 지닌 곳은 바로 우리 뇌와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에스더 M. 스턴버그 미국의 신경 건축학자,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p.29-
EBS 극한직업 프로그램 《비워야 산다(특수 청소와 정리정돈)》에서 청소 의뢰인은 전문가에게 자기 집 청소를 의뢰한다. 의뢰인은‘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아서 살기 위해 의뢰를 했다.’고 말한다. 스스로 치울 엄두가 나지 않고 방법도 모른다고 했다. 의뢰인의 집은 기겁을 할 정도로 어질러지고 쓰레기가 쌓여있다. 입구부터 사람이 지나다닐 틈도 없이 뒤엉켜 있다. 쓰레기들이 썩어서 악취도 난다. 바퀴벌레들이 득실거려 전문가들조차 움칫거릴 정도다. 의뢰인들도 처음부터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상실감이나 질병으로 살 의욕을 잃었거나 정리 정돈하는 법을 몰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내보내는 행위를 한다. 그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난 뒤 남은 음식은 쌓아두면 쓰레기가 된다. 입은 옷도 다시 빨아서 입지 않으면 냄새가 난다. 매일 먹고, 입고, 쓰고 남은 것은 정리 정돈해서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 버려야 되는 것을 제 때에 버리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 이는 내 욕심이 작동해서 그럴 수도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버리고 비우는 방법을 배우면 된다. 문제는 내가 버려야 된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저장강박증이라는 게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이다. 계속 쌓아놓는다. 결국은 내가 쌓아놓은 더미에 깔리고 만다. 내 마음의 짐도 마찬가지다. 매일 누구와 만나 기대를 하고 내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아 서운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들었었을 수도 있다. 당사자 앞에서 내가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간 관계가 깨질까 두렵다. 웃는 얼굴로 태연한 척하면서 헤어진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도 온통 주의는 조금 전 만나서 비즈니스를 했던 그 장면에 빠져 있다. 내 온몸이 긴장되어 걷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누군가를 불러내거나 편의점에 들러 술을 산다. 포장마차에서 내 얘기를 들어주는 누군가에게 하소연과 넋두리를 한다. 정작 내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니하지 못하고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과 감정은 치우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남겨진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마음의 여유 공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나도 상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까지 내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마음속’이라는 말조차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을 청소한다’는 말도 내 기억의 정보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이나 신문 방송에서 그런 말을 했는데도 내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들었기 때문이다. 선택적 주의를 한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는 그런 말은 먼 달나라 이야기였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사회에서 평가하는 성공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나를 비교하면서 나도 뒤처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성공의 잣대는 겉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뛰어가니까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뛰었다. 그야말로 즉흥적인 자동반응 기계였던 것 같다.
멈추어서 나를 차분히 점검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생각한 대로 풀리면 기분이 좋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여건이 맞아서 잘 풀린 것도 모르고 내 방식대로 해서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나의 노력과 빈틈없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짜증이 났다.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협조해주지 않는다고 속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험담하면서 화를 냈다. 나에게 우호적인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입장을 지지해달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더욱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밀어붙였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 수준은 높아만 갔다. 모든 과정이 지뢰밭처럼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긴장 상태였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 마음속에 어떤 잡동사니가 쌓여가는지 관심이 전혀 없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가 태어나 자라면서 스스로 터득한 생존의 기술을 자동으로 사용했다. 내가 정한 기준, 잣대, 선입견, 고정관념이라는 관점 장비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익숙한 방식으로 재빨리 진단을 내렸다. 내가 가진 장비의 범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모두 부당하다고 단정했다. 정당하지 않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통제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좌절했다. 마음속에는 분노의 감정이 구석에 쌓였다. 내 마음속에는 감정을 품은 기억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기억에 붙어 쌓인 감정이 슬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냄새가 새 나오지 못하도록 보자기로 감쌌다. 그리곤 콘크리트로 칸막이를 쳐 막았다.
나는 올해 20년을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애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살았던 집이다. 이사하면서 안 사실이 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물건, 책들이 그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다. 매일 조금씩 정리하는 데 일주일은 걸렸다. 이삿짐센터 전문가가 사전에 집을 둘러보고는 ‘오래 사셨나 보네요’라고 했다. ‘어떻게 아시나요요?’했더니 오래된 물건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남의 눈에는 보이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이 년 해가 갈수록 버리는 것보다 쌓이는 것이 더 많다. 추억이 되는 물건이라서, 언젠가 비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아두었다. 눈에 익숙한 광경이지만 점점 집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안을 정리해서 공간을 마련하면 되는데, 너무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했다. 이대로 모두 가져갈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에스더 M. 스턴버그 2는 미국의 정신건강 전문가이면서 신경과학과 건축학의 연결을 시도한 신경 건축학자다. 그는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라는 책에서 외부공간이 인간의 뇌와 마음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외부공간의 변화에 따라 우리 몸의 세포 유전자 수준에서부터 몸 전체가 같이 출렁인다는 것이다. 공간이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채워지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고, 공간이 밝고 편안하면 몸과 마음에서 치유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내 삶의 공간은 나의 뇌와 마음, 사고와 행동, 감정, 기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마음이 공간을 살린다’ 고도 말하고 싶다. 내 마음속이 깔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으면 편안하고 탁 트인 기분이 든다.
마음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과 같다. 내 삶의 공간에 있는 물건과 식물들의 특성을 알아보는 눈이 열린다. 필요한 것과 욕심을 내는 것을 분간할 수 있다. 내 마음속 상태만큼 공간을 깔끔하고 편안하게 꾸밀 수 있다. 반대로 내 마음속이 잡동사니 생각이나 기억 덩어리로 가득 차 있으면 답답하고 불안하다. 마음의 여유 공간이 그만큼 줄어든다.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포용하지 못한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주의 attention(한정된 정신 자원의 배분)가 그만큼 줄어든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사는 공간도 지저분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내 눈앞에 물건이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 내 마음의 주의가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어느 것 하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청소를 할 때까지 쌓아놓은 마음속에 짐과 먼지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온갖 원한과 억울함, 열등감, 두려움, 무서움, 놀람, 미련, 집착, 선입견, 고정관념 덩어리였다. 부모님, 형제, 가족, 친구들과 부대끼면서 들어온 먼지들도 있었다. 학교와 사회생활하면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떠안은 짐들도 있었다. 내가 언젠가 보상받고 인정받기 위해 마음속에 구겨 넣었던 것들도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꽉 차 있었다. 10대~20대, 30~40대, 50대 이후까지 쌓아놓기만 했다.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왜 좀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영리하게 산다고 착각한 나의 무지(無知), 어리석음이 있었다. 안갯속에서 길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