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린 감정은 의식 밑에 숨은 채로 우리의 마음을 구속하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중략) 우리는 정신적 억압을 어떻게 멈추는지 알아야만 한다. 욕망, 두려움, 분노 등의 감정이 ‘떠오를’ 기회를 주어 이를 의식하고 변형시켜야 한다.
-《기도 prayer》, 틱낫한-, (p145)-
“문 좀 열어줘요, 내릴 겁니다. 죽을 것 같아요.”비행기 출입문 앞에서 나는 소리쳤다. 비행기 출입문이‘철거덕’ 하고 닫히자 갇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순간적으로 내 자리에서 출입문 쪽으로 번개같이 달렸다.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올리고 승무원들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버둥거리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물을 가져왔다. 나는 물을 입에 축이듯이 하고는 컵을 내동댕이치면서 다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승무원 두 명이 나를 붙잡고 승무원 자리에 앉혔다. 숨을 크게 쉬어보라고 했다. 내 귀에는 그런 소리가 멍멍하게 울리기만 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온몸이 조이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승객들이 비행기 출입문 쪽의 실랑이를 고개를 내밀고 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나는 승무원들에게 부축되어 내 좌석에 앉혀졌다.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양손으로 가슴을 꽉 붙잡고 있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해서 50분 정도의 비행시간이 지나갔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다시 가슴이 답답했다. 비행기 안에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더 초조해졌다. 가방을 움켜잡고 그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착륙하고 난 뒤 비행기 문이 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 시원할 줄 알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공항 대합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숨이 막혀 죽을까 봐 온몸을 긴장시키느라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한바탕 꿈같은 악몽이 지나간 것 같이 느껴졌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비행기 안에서 죽는다고 소란을 피웠던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을까? 나는 내가 창피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도 잘 다니는 데 나는 왜 이럴까?’ 자책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나는 이제 비행기 못 타는 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40대 초반 나는 비행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울산으로 가는 아침 첫 비행기였다. 이때부터 나는 4년간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나는 회사에서 비행기로 국내외 출장하는 일이 생기면 갈 수 없는 구실을 미리 만들었다. 호의적인 상사가 보상 차원에서 힘써서 나를 추천했는데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름휴가 기간에 가족들이 제주도 여행 다녀오자는 말을 꺼낼까 봐 겁이 났다. 미리 차를 타고 다니는 휴가 일정을 짰다. 그 당시에 나는 이미 차를 운전하고 고속도로나 터널을 지나가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가족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여름휴가는 다녀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내 가족에게 추억 거리를 남겨주고 싶었다. 3년째 되는 해에 가족들은 제주도에 한 번 다녀오자고 했다. 내가 제주에서 2년 동안 근무할 때 다녔던 곳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가족들에게‘내년에 가겠다’고 하고서 다음 해에도 약속을 못 지켰다.
나는 4년 만에 아내와 애들에게 비행기 공포증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그런 일을 왜 이제야 이야기하느냐?’고 원망했다. ‘그렇게 힘든 걸 가족들은 몰랐다’고 미안해했다. ‘당신이 비행기 탈 수 있을 때 여행 가면 되니까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족의 이해와 지지에 가슴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든든한 가장이고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털어놓지 못했다. 그토록 털어놓기 힘들었다. 털어놓고 나니 내 가슴속에 팽팽하게 차 있던 가스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제는 숨기면서 긴장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털어놓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남편으로 아버지로 그냥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나의 상태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비행기를 타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나의 아픈 부분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는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해 온 ‘속마음 털어놓기’ 훈련 덕분이었다.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꾹꾹 눌려있는지, 어떤 바람과 기대를 가득 품고 있었는지 찾아내어 마음속으로 털어놓는 작업을 했다. 내 마음속에 쌓여있던 원한, 분노, 화, 적개심,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에너지가 빠져나갔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을까?’하면서 나를 인정하고 다독 거리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내가 무엇에 그렇게 매여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지방으로 좌천성 발령을 받은 이후 시작된 스트레스 후유증은 하나씩 회복되어 갔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냥 타보자’ ‘아니야, 안 될 것 같아’ 논쟁이 벌어졌다. 하늘에 보이는 비행기 모습을 봐도 그렇게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또 벌어지면 어떡해?’라는 속삭임이 나를 붙잡았다. 온몸 구석구석이 한꺼번에 들뜨는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이제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거나 터널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배를 타거나 기차를 타는 것도 혼자서 할 수 있었다. 가끔은 두려움 반응이 ‘훅’하고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견딜 수 있었다. 꾸준히 내 마음속에 쌓여있던 감정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훈련을 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비행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탈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혼자서 말 못 하고 끙끙거리는 속앓이는 접은 지 꽤 되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상태를 털어놓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찾아다녔다. 비행공포증 클리닉을 찾아갔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유럽에서 배워온 프로그램이었다. 유럽인들은 회사 출퇴근을 이웃 나라로 출퇴근을 할 정도로 비행기를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그에 따라 비행기 공포증도 많이 경험하기 때문에 비행기 회사에서 장기적 고객 유지를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공포증이 어떤 것인지, 원인과 과호흡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교육받았다. 비행기 구조와 비행기 안에서 공기 순환 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비행기 고도가 높아지면 공기가 탁해 숨을 쉬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독방에서 제자리 달리기로 극단적인 과호흡을 유도한 뒤 견뎌보기 연습도 했다.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와 구부러진 도로를 다녀오기, 서울역에서 대전역까지 KTX 왕복 체험도 했다. 김포공항에 있는 ㅇㅇ항공 격납고에 있는 비행기에 올라갔다. 조종석과 일반 좌석, 비즈니스석, 화장실 등을 비행기 내부 곳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앉아보면서 감각을 익히도록 했다. 승무원 훈련용 시물레이션 장치에 들어가서 체험도 했다. 여기까지는 두렵지 않았다. 프로그램 마지막 날에 김포공항 발권 창구 앞에 정해진 시간에 모이도록 했다. 클리닉에 같은 기수로 참가한 사람은 나 포함 5명이었다.
리무진을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이고, 지금까지 훈련한 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호흡을 길게 했다. 소변도 나오지 않는데도 화장실에 갔다. 발권 창구 앞에 가서 치료자와 보조자 그리고 일행을 만났다. 이제 꼼짝없이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복식호흡을 계속했다.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왕복하는 비행기 직접 노출 훈련이었다. 맨 앞 좌석에 앉았다. 승무원이 물을 한 잔 먼저 가져왔다. 치료자는 복식호흡과 이완 훈련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울컥울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냥 뛰어나가고 싶었다. 벌써 2명은 가슴을 안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했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괜찮아, 비행기 안에서 숨 쉬는 공기는 초일류 호텔보다 더 안전하고 깨끗하다고 했잖아’‘치료자가 옆에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죽지는 않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20여 분이 지나니까 조금 진정이 되었다. 물을 한잔 먹었다. 시원했다. 그때서야 비행기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옆좌석, 뒷좌석, 비행기 선반도 보였다. 치료자는 나에게 과제를 주었다. 일어서서 비행기 맨 뒤쪽까지 갔다가 오라는 지시였다. 걸어가면서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들을 보면서, 비행기 선반과 좌석 등받이를 만져보라고 했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고 오라고 했다. 드디어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앞에 있는 야자수 나무가 너무 좋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장면인가.
나와 우리 일행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함을 느끼면서 서로 잘 견뎌냈다고 격려했다. 제주의 공기를 공항 밖에서 마음껏 마셨다. 2시간 뒤에 다시 김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번에 좌석은 중간이었다. 승객들이 계속 들어오니까 갑갑한 느낌이 올라왔다.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복식호흡을 계속했다. 드디어 다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식당에 모두 모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치료 프로그램의 마지막 과제를 받았다. 3개월 이내에 비행기를 타본 후에 그 경험을 치료자에게 전화나 메일로 하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했다. 그 당시 기분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치료자는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시도할수록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 후 3개월 안에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내가 치료까지 받았는데 왜 망설이지?’ 나를 다시 점검했다. 과호흡에 대처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복식호흡, 이완훈련도 할 수 있었다.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속마음 털어놓기를 계속했다. 두려움에 대해, 죽음에 대해,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했다. 드디어 치료 프로그램을 마친 뒤 6개월 만에 비행기를 탔다. 회사에서 제주에 출장을 다녀왔다. 동료들과 다녀왔다. 동료들은 나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창피하다는 생각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5년 만에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나에게는 잃어버린 5년일까? 아니면 성장을 위한 진통이었을까? 나는 성장했다. 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해 준 5년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