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어지럽힌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근심 걱정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 최초의 경전《숫타니파타》, p.29.-
나는 정년퇴직을 15일 남겨두고 SNS에서 은퇴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울적했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저렇게 퇴직 준비를 잘했을까?’하는 부러움이 올라왔다. 부러움일까? 시샘일까? 남들처럼 은퇴 이후의 노후 자금을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또 다른 자료를 뒤적이고 있었다. 노후 자금, 집, 자녀, 부부 관계 모두 잘 해결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회사에서 같이 퇴직하는 동료들도 나보다 준비가 잘 된 것 같았다. ‘나는 무얼 했길래 부동산이나 주식에 무관심했나?’하는 생각에 나를 자책했다. 불안한 감정도 올라왔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라는 초조한 생각도 올라왔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비교의 늪에 빠질 때면 주눅이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아닌 한 은퇴 후에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나와 처지가 비슷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숨겨두었던 카드를 꺼낼 때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열심히 바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년퇴직이라는 중간 결승점에서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괜히 울적하다. 속히 쓰리고 배가 아픈 느낌이 얼핏 얼핏 올라온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이 나에게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런가?’하고 나를 질책하는 생각이 올라온다.
순간 ‘어허,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지?’‘비교의 유혹에 잠시 넘어갔구나’를 알아차렸다. 부러워하고 시샘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시샘도 올라 올만 하지!’라고 나를 다독였다.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라고 나를 토닥였다. 자책하는 마음도 올라왔음을 받아들였다. 불안한 감정도 내 마음속에 올라왔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호흡이 약간 짧아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긴장되고 초조한 생각이 올라온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였다. 그 순간 나를 위로한다고 ‘돈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그런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그런 생각이 올라왔구나’하고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였다.
TV나 SNS에는 ‘나나 랜드’에 사는 사람들을 소개하곤 한다. 외부의 기준이나 평판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남들과 비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할까?’ 나는 그들의 용기와 실천이 또한 부럽다. 자연인의 삶, 혼자 사는 삶에서는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을 것 같다. 외로움과 고독을 기꺼이 대가로 치를 수 있는 사람이면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삶이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죽을 만큼 괴로워서, 혼자만의 삶을 음미하고 싶어서 건강을 위해서 등등. 비교할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주인공으로 사는 데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직 혼자 사는 외로움이 더 힘들 것 같다. 세상 사람들과‘적당히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것이 덜 힘들 것 같다. 적당히 비교한다는 게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사람들과 같이 살다 보면, 비교하는 생각이 언제든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 데리고 오는 친구들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불안감, 초조함, 시기심 등 감정과 ‘내가 더 노력해야 된다.’는 강박적인 생각 등이다. 비교하는 생각이 마음속을 휘저을 때는 낙담할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분노의 감정도 올라올 수 있다. 속이 쓰리고 배가 더부룩하고 아플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게 ‘적당히 비교’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40대 초반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삶의 끈을 놓을까?’를 고민하던 때였다. 그때까지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나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죽을 만큼 힘들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마음으로 우연히 ‘속마음 털어놓기’를 배웠다. 내 마음속에 어떤 것들이 쌓여있는지 들여다보았다. 냄새가 진동했다.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 장면들을 털어내어 보았다. 나의 비교하는 마음의 찌꺼기가 쌓여있었다. 내가 자란 동네는 시골의 면사무소가 있고 학교가 있는 곳이다. 같은 동네인데 차가 다니는 다리를 두고 부유한 애들이 사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나뉘었다.
나는 다리가 있는 경계선에 살았다. 딱 비교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다 같이 비슷한 가정형편이었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비교하는 마음의 생채기도 나지 않았을 텐데.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을 새겨들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부유한 애들의 부모는 아버지가 교사, 면사무소 공무원, 가게 주인, 양조장 사장이었다. 나는 겨울 방학이면 나무하러 가는데, 걔들은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다. 그런 애들이 부러웠다. 내 눈에 보이니까. 딱지치기, 구슬치기 놀이할 때도 나는 부잣집 애들이 부러웠다. 내가 한나절 동안 들판에 나가서 개구리 잡아 맞바꾼 딱지보다 걔들은 10배 20배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어릴 때부터 남들과 비교하고 혼자 마음속에 쌓아두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내가 가진 물건, 신체조건, 돈, 인기, 배짱을 남들과 비교했다. 나는 내 위에 아무도 없는데 누나도 있고 형이 애들이 든든할 것 같아서 부러웠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들이 가지고 있으면 부러웠다. 내가 어렵게 구한 것을 남들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짜증이 났었다. 나를 따라 한다고 못마땅해했다. 그들이 나를 시샘해서 내가 가진 것을 쉽게 편법으로 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배가 아팠다. 인정해주기 싫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못하다고 깎아내렸다. 남이 가진 것에 진정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온통 시샘과 질투심만 쌓았던 것 같다.
나는 성인이 되어 직장이라는 비교와 경쟁의 공개적인 전쟁터에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40대 초반이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기도 했다. 비교한다는 생각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나의 비교하는 전문적인 기술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생존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도 않는데도 그냥 배 아파하고 스트레스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생각-감정의 회로’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다르다. 속마음 털어놓기 훈련을 통해 내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내 마음속에 잠깐 혼란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 끝을 알기 때문에 나는 평온해지기를 기다릴 수 있다. 비교하는 마음은 괴로움을 일으킨다. 머리로는 비교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그럴수록 더 비교하는 상대에 매달린다. 비교 상대에 마음이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는다. 상대를 훼손, 훼방하거나 부당하다고 비난하고 혐오하기도 한다. 상대가 잘 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지인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시샘이 일어날 때는 괴롭다. ‘뭐 이런 일에 내가 또 끌려가나?’하면서 나를 질책한다.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남과 비교하고 부러움과 시샘을 경험할 것이다. 시샘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 속마음을 깊이 살피지 않으면 시샘의 유혹에 내 자존감이 상처를 입는다. 주식 대박, 부동산 대박의 소리가 들린다. 미리 준비한 사람들이다. 부럽다. 한편 나는 어떤가? 바로 비교가 시작된다. 나에 대한 평가가 시작된다. 만약 이 순간에 비교하는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시샘의 불을 끌 수 있다. 나의 속마음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토닥여주고받아주고 인정해주면 된다.
비교하는 마음과 시샘하는 마음은 없애려고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은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생각과 감정을 주인인 내가 받아주면 된다. 가끔 배가 아픈 것도 느끼면서 사는 게 성장 성숙해가는 것이 아닐까? 미국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 피터 케이브 Peter Cave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철학적 이유》라는 책에서 시샘의 이유를 설명한다. “행운의 여신과 마주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너진 ‘평등’이 다시 회복된다. 시기심은 그런 평등의 부활을 기뻐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시샘하기도 하는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살면 되지 않을까? 시샘하지 않은 척 사는 것이 더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