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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곰돌이 Dec 09. 2022

[에세이] 남이라서 할 수 있는 말 ‘참고 견뎌라.’

 요즘 1분 정도의 짧은 여유가 생기면 버릇처럼 핸드폰을 들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곤 합니다.

 어김없이 인스타그램을 보던 어느 날, 여자 아이돌 그룹인 이달의 소녀의 멤버인 ‘츄’가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프로그램에 나와 이야기한 짧은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방송과 광고에 많이 등장했는데 1년 동안 출연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슬픈 내용과 함께, 이런 힘든 상황을 포함한 과거의 숨막히던 상황들이 견디기 어려웠고, 참고 참다 긴 고민 끝에 자기 인생에서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제일 의지를 하는 가족에게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참고 견뎌라’라는 말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며 오은영에게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순간 예전의 제가 겪은 상황과 겹쳐지기 시작하며 갑자기 깊은 감정이입이 되며 눈물이 찔끔 고였습니다.   

  

 저도 츄와 같이 표면상으로 좋아 보이는 시절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취준생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대기업에 당당히 합격해 사회초년생으로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회사에서 적응도 잘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만 가득할 것 같은 날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침 6시 반에서 저녁 10시까지 일을 해도 일은 끝나지 않는 야근과 주말 출근은 밥 먹듯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매일 에너지 드링크를 먹으며 생각보다 적은 월급에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인생의 목표와 미소를 잃어가며 고된 야근 후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내일 출근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는 그 순간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자고 일어났으면 과거로 시간이 돌아갔으면’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일의 목적과 의미는 하얀 백지장처럼 사라져 빛이 바래졌습니다.


 이렇게 무작정 참고 견디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마음속에는 ‘과연, 지금 나의 인생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진정으로 내가 원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피어났습니다. 출근을 독촉하는 알람이 울릴 때도, 회사에서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끊임없이 이렇게 힘듦만이 가득한 희망 없는 지금이 맞는 것인지 반복해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수만 번의 자문자답을 하던 어느 화창한 봄날의 점심시간, 날이 좋아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날이 매우 좋네, 밥 먹었어?”

“어 먹었지. 막 먹었나?”

“나도 먹었지.”

“일은 잘 하고 있나?”

“어…. 아니 너무 힘들어. 새벽같이 출근해서 매일 10시에 퇴근하는데 힘들어 죽겠어. 못 다니겠어.”

“힘들긴 뭐가 힘드노! 힘든 게 당연한 거지! 어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는 줄 아나?! 딴생각하지 말고!”     


 경상도 특유의 억센 억양과 함께 호통이 들어오는 순간 가슴에 뭔지 모를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전화를 끊자마자 힘없이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유 모르게 가슴이 저릿하게 저렸습니다. 날은 화창했지만, 저의 마음은 역설적이게 전혀 화창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후 똑같은 점심시간 평소엔 잘 연락하지 않는 누나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통화할 수 있어?”

“응. 가능하지 지금 점심시간이야.”

“엄마한테 회사 못 다니겠다고 했다며? 왜 힘들어? 그만두고 싶어?”

“응.”

“회사는 힘든 게 당연한 거야. 세상에 힘들지 않은 회사가 어디 있겠어. 남들은 거기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데 너는 들어갔잖아. 너 거기 보내려고 아빠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면서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네가 회사를 나온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질 것 같아? 더 힘든 일뿐이야. 좋은 회사 들어갔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지. 힘든 건 당연한 거야.”     


 조언인지 질책인지 모를 누나의 통화가 끝나고 엄마와 통화했을 때처럼 가슴이 저릿하게 저리기 시작했습니다. 계단에 가만히 서서 이 마음이 무엇인지 살펴봤고 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허함이었습니다. 아무도 저의 힘듦은 이해해줄 사람은 없었고 들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혼자 무인도에 떨어진 조난자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가족만은 제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왜 힘든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빈말이라도 위로를 해줄 줄 알았는데, 응원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세상엔 참고 견디라는 말뿐이었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청춘의 아픔을 옹호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인생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아니 가족이라서 더욱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잘되라는 의미로, 가족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상처가 되는 말들을 여과 없이 건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것이 비수가 되어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가족이니 이해하라고 당연하다고 사회는 종용합니다.     


 힘들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해결책도, 참고 견디라는 말도, 남들은 다 그렇게 산다는 말도 아닌 그저 단순한 한 마디 위로를 바랍니다. 저런 말들은 듣고 싶은 말이 아닙니다. 그저 ‘힘들었겠네.’, ‘힘들지, 고생 많아.’, ‘힘들면 때려치워도 돼.’, ‘맛있는 것 사줄게.’와 같은 위로를 듣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힘듦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견딜 힘도 있고 견딜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같은 더 가까운 사람일수록 한 마디 위로의 말을 더 듣고 싶어서 하고, 가족의 따스한 한 마디 위로가 세상 그 어떤 무엇보다 힘이 됩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힘듦을 이야기했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해보세요.   

   

‘많이 힘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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