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들을 모두 그려놓기로 하였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간다 생각했기 때문이고, 뒤늦게 그것들과의 교감이 절실했다. 그것들은 기억이라는 썩 믿음직하지 못한 수단으로 당분간 내 주위에 맴돌지 모르겠다. 때론 아지랑이 피는 봄볕으로, 어떨 땐 시린 겨울의 감촉으로. 나는 그때마다 그 아련함을 아쉬워하고, 또 추억으로 설레리라. 하지만 이 또한 언젠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리라 생각한다.
1. 그래! 그런 곳이 있었지
판잣집에 가까운, 그런 초라한 집들의 소멸을 사람의 죽음 이상의 비애로 여겨도 이해하시길 바란다. 비단 건축가의 입장이 아니라도, 장소의 변모와 그로 인한 기억의 멸절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아리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도시의 운명이 그렇다. 삶의 진보란 명제 앞에 추억 따위는 늘 불편한 걸림돌이 아닌가.
나는 그런 것이 슬프다. 예를 들어, 이곳의 건축적 실체가 실로 허약하고 초라한 것이라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곳에서 보낸 질곡의 시간마저 덤프트럭에 담아 멀리 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먼 훗날 이 땅에 다시 설 때, 땅의 기억을 소환할 수 없음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될까? 그리하여 재개발을 앞세워 번듯한 건축과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는, 그 건축가의 적법에 대한 주장은 대놓고 당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이 제각각인 바에 어찌 서로의 주장을 탓할까. 하물며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사이라면. 그 집들이 철거되는 현장에는 두 진영으로 분리된 사람들의 갈등과 동조의 편린들이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 또한 슬픈 일이다. 절묘한 해결은 결국 이곳에다 건축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나는 순행을 점칠 수가 없었다.
운명이라 할까? 얄궂게도 건축가는 늘 새것과 헌 것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게 된다. 사라질 집들 뒤에는 보란 듯이 새집들이 번듯하다. 그러한 양면의 도시 앞에서 내 그림은 사라질 것들에 더 집중하여야 한다. 그림이라도 그려 두어야지. 마음이 아린 것을 더 선명하게 그리고, 좀 더 긴 시간 지속할 새것들은 불분명하게 그려 놓겠다. 딴엔 공평한 입장이다.
붉은 PVC 물통이 나뒹구는 좁은 골목길과 질서 없이 허술한 판잣집 그림을 여러 장 그릴테다. 내가 그러한 지점에 존재하였다는 개인적 확인일뿐더러, 모든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다. 다시 말하여 ‘매축지 마을’이 없어지던 역사의 어느 시점에 내 두 발로 서서 “모든 사라지는 것은 슬프다.”라고 진혼곡이라도 불러주려 하는 것이다.
2. 그 여린 것을 꺾다
예상치 않게 오래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에 없던 습성이 생긴 것도 당연한 것. 집 안 구석구석의 물건에도 눈과 손이 많이 간다. 오늘 자른 꽃도 예외가 아니다. 덕분에 작은 것들의 운명에 대하여도 세밀히 생각할 수 있었다면, 갇힌 집에서 갖는 작은 보람이라 할까?
한참 고민하다 먼저 피운 큰 꽃을 자르기로 하였다. 아직 생생하여 좀 더 두고 보아도 될 일이었건만, 그 아래에서 막 피어오르는 어린 꽃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작은 화분이 여러 송이의 꽃을 감당하기에 얼마나 버거울까? 그렇다면 큰 꽃이 양보하는 게 이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에 자른 꽃은 병에 꽂아 놓고 보다가 그림으로 그려두기로 한다. "한 때, 저리 아름다운 꽃이 있었노라." 화려했던 큰 꽃의 시절일랑 스케치북에 남겨, 두고두고 회상하면 될 일.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은 물론 세사의 이치이고 도리이다. 아~ 시간을 맞이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방법. 꽃과 나는 기꺼이 동조하였다.
반면, 집 밖의 세상은 바야흐로 정치의 시절이다. 연설과 글로 일방적으로 주장하던 이전과 달리 숱한 정보로 개인의 속내와 집단의 성향이 인터넷 등으로 속속들이 드러나니 정치인들도 꽤 곤혹스럽겠다. 강력한 수단이던 슬로건과 이념의 공허가 드러나고. 진짜 실력에 대하여 가늠하는 일은 이젠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령 몇 개의 공화국을 거쳐 말을 바꾸어가며 정치 생명을 이어온 진부한 정치인이 있다 치자. 시대에 맞지 않는 그 노회한 분께서는 자신의 실력을 곰곰 생각하시어, 꽃이 스스로 고개를 꺾을 때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으시면 어떠실지?
병에 꽂힌 잘린 꽃을 보며 애써 놓지 않으려는 시간의 공허함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시간이란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앞으로의 것이라야 아름답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고집과 관념에 매몰되지 않을 진짜 실력은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꺼이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 때가 되면 꺾일 자세는 되었는가? 그리하여 아름다운 과거로 남을 준비는 하는가. 그때 비로소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고 실토할 터인가.
3. 그리고 천년 나무를 그리다
도저히 다 담지 못하는 나무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천년 나무라 부르고 싶었다. 소설가 마루야마-겐지는 그의 소설 ‘천년 동안에’에서 나무의 입을 빌어 나약한 인간에게 말했다. “잘 태어났다. 이 세상은 어떻게든 살아보고 싶다고 강하게 바라는 자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살아라! 겁내지 마라! ”
며칠 사이 동서와 친구의 죽음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오늘 불길처럼 번져 오르는 나무의 생명을 그린 그림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에 대하여 생각한다. 생명, 그것은 얼마나 오래가야 하는가? 그것의 상실은 왜 이다지 슬픈가? 그리고 내가 저 끈질긴 생명의 나무를 내 그림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성찰하자.
수영사적공원 푸조나무를 그린 화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오호라. 내가 저를 다 담지 못하는 이유는 나무가 키운 덩치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나무의 꿋꿋함이다. 천년을 지나도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봄에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거두는 성실한 순환이라든지, 굴 껍데기처럼 거친 등걸에서도 아기 손같이 보드라운 순을 발아시키는 순한 고집이라든지. 그런 것을 마땅히 발견해야 함이다.
소설가의 관찰도 결국 그러했다. 끊임없는 의지. 참 생명은 거기에서 온다. 천년 등걸의 나무가 그러하듯, 둔한 내 붓끝에도 발아하는 생명이 있지 않을까? 나무야 나무야, 천년 나무야! 매번 온전하게 다 담아내지 못해도 내가 계속 너를 그려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생명의 영원함에 대하여 생각한다. 아~ 죽음 또한 큰 순환의 한 절차. 어찌 그분들의 생명이 사라졌다고 말할까?
천년의 나무를 닮아, 나는 그들의 죽음 앞에 다시 서련다. 슬퍼도 아파도 지금은 꿋꿋해야 할 때. 그리하여 나 또한 천년을 꿈꿀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