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화첩단상

만년필 청소

일상을 말하다

by 이종민
그림 이종민



막힌 만년필들을 청소하였다. 세 개에는 먹물을 채우고, 나머지 셋은 수성 잉크를 넣었다. 마침내 테스트, 청소를 끝내고 첫 글을 쓴다. 만년필이 내가 생각했던대로의 굵기와 농도로 글씨를 만들어 줄 때의 희열은 큰 즐거움의 하나다. 소소하다고 하기에는 설렘이 제법 크다.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무척 인문적인 일이라서, 컴퓨터 자판으로 생각을 담는 행위와 사뭇 다르다. 펜 끝이 종이에 닿아 서로 교환하는 미세한 느낌들이, 긴 만년필의 몸통을 거쳐, 또한 내 손과 팔을 통하여 내 머리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글씨의 모양 자체와 느낌을 관찰하게 된다. 이어서 그것들이 모여 실체로 남게 될 나의 문장과 어떻게 어우러지는가 생각하게 되고. 혹은 고치고 혹은 다음 글씨로 이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글씨를 쓴다는 일은 나의 미적 관점과 생각의 통로를 여는 첫 과정이 된다. 하물며 잠시 멈추고 글의 역사와 아름다움의 근원을 생각케 된다. 그러니 어찌 인문적이라 아니 할 수 있을까?


내친김에 미루어진 일기마저 숙제하듯 끝내었다. 아무튼 여섯 개의 만년필을 청소하고 좀 긴 시간 동안 손글씨를 썼나 보다. 만년필 청소 덕분이라 할까. 마음까지 씻게 되지나 않았는지? 가을 아침이 하늘처럼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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