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화첩단상

부석사

일상을 말하다

by 이종민


안양루에서 뒤돌아 태백준령을 보며 호연지기를 세우던 시절이라든지. 가쁜 숨, 아홉 단 석축 밟으며 건축의 맛에 빠지던 시절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노란 은행잎 사이를 지나던 통통 튀던 젊은 발걸음이라든지. 벌써 너댓번은 넘었을 테다.


진눈깨비 뿌리는 깊은 겨울의 산사에 다시 오다. 그런 오래된 감정의 소환이 아니라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늘 부르면 달려가는 곳이라서. 굳이 여행이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적당한 설렘이 전부였다. 어느새 내가 이곳과 친숙해 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이젠 더 여유롭게 올 수 있을만큼 세월이 흐른 건지.


이번엔 태백을 뒤돌아 보지 않아도 후회가 없고, 조사당으로 오르는 굽은 길에 오히려 집중한 것이며. 연신 사진을 찍기 보다는, 시간을 기다려 아침 예불에 잠시 참여해 보기까지 하였으니. 이 또한 내 삶을 관통하는 잔잔한 시간의 흐름일까? 하물며 그것을 거부할 힘의 소멸조차 별로 억울하지 않으니 여행이 더욱 편했다고나 할까.


오히려 집으로 돌아온 후에, 신경숙의 소설과 최순우 선생의 글과. 유홍준의 답사기를 다시 읽어보는 뒷맛이 좋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무량수전 마당 모서리의 나무가 헷갈려하던 매화, 벚꽃이 아니라 돌배나무꽃이었다는 사실이 마치 오래된 숙제를 푼듯 신이 나고. 잠시 그것을 자랑하는 아이의 마음이 되었다.


어느듯 설렘과 감동 보다는 자잘한 여운이 좋아진 것이다. 몇 장의 그림을 그린다. 화각을 말하라면, 무량수전의 아름다움과 안양루의 기세 보다는. 두 건물의 처마 사이에서 아침 예불을 기다리는 사람의 풍경에 더 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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