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1992년 미국 대선후보 빌 클린턴의 선거구호이다. 일반론에 의존하지 말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직시하라는, 이 구호에 힘입어 클린턴은 선거에서 이겼다. 이후 나는 이 말을 스스로 다잡는 문구로 삼았다. ‘문제는 창의력이야. 이 바보야!’
사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어디 개인의 문제에 국한될까?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이니,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공유 의식이 필요하다. 일반론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도시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도시의 생존력과 직결된다. ‘문제는 창의력이야.’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 말은 더욱 절실하다.
여태까지의 비창의적인 태도를 반성한다면? 예컨대 서양의 도시계획을 모방한 교과서적인 가로망, 홍보에 열중한 가시적 랜드마크, 경제적 손익에만 바탕을 둔 확장과 개발. 그런 것들이 이 도시의 지금 모습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어정쩡한 도시의 현대는 바로 전 시대인 근대와도 소통하지 못한 채 정체성을 잃고 있으며, 고층화된 도시는 세련되었다고는 하나 그 속에서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인 것은 아닌지?
부산의 원도심에 위치한 몇몇 지자체가 또다시 산복도로 주변의 고도제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주변과의 형평을 내세운 주민의 숙원사업이라는 주장에다 이번엔 북항재개발과 도심의 균형 문제를 보태어, 지난 50여 년간 유지된 도시계획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지자체의 주장이 관철되면, 지역의 경제적 가치 변동은 필연적이다. 여기에 자본이 침투하면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 휘몰아칠 거라는 우려는 이미 경험된 바이고 불안한 이유다. 그렇다고 소극적 볼거리로 그 넓은 지역을 방치해야 할까? 일컬어 벽화가 그려진 판자촌과 그것을 둘러보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유아적 발상을 얼마나 더 유지해야 하는지? 양날의 칼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문제는 더욱 특별하다. 다운타운에 만연한 집장사라는 아비규환을 윗동네로 전염시킬 것인가? 아니면 어정쩡한 ‘산토리니’로 남겨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어쩌면 이곳의 사례가 부산이라는 도시의 미래를 결정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타지역 사람들이 질문한다. ‘산복도로가 뭐예요?’ 우리에겐 익숙한 단어가 저들에게는 생경하고 유일무이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곳에 데려가면, ‘와!’하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그들과 나는 마침내 이 도시의 내력과 풍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의 인문적, 도시계획적 가치를 이만큼 직설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운타운에서 실패한 밀집한 건물군의 방향은 아닌 것 같다. 빛나는 창의력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창의력은 일부 지자체 주민의 숙원과 일시적 비교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 모두로부터 나와야 하고, 공평하고 전체적이어야 한다. 일컬어 ‘경제성에 앞서 도시의 풍토, 지리, 역사, 등 인문적 관점이 도시 그림의 밑바탕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고 앞으로 더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의회의 의사봉으로 쉬이 결정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시민 또한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집이 넘치는 도시에서 집의 생산이 답이 될까? 제한은 늘 발전의 걸림돌인가? 그때마다 제한을 풀어 몸집을 불린 이 도시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그림은?
답이 있을 법도 하다. 또 묻는다. “문제는 창의력이야. 이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