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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Apr 28. 2023

꽃과 물, 그리고 땅

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진달래를 보러 나선 길. 비슬산 언덕의 군락이 장관이라,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정이었다. 하얀 종이에 연분홍 물감을 번지게 할 일이 새벽부터 설레었다고나 할까? 차 안의 모두가 어린 소녀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꽃이 다 졌다는데요.” 그리고 웅성웅성. 결국, 차의 방향이 밀양 위양지 쪽으로 틀어진다. 가로수로 심긴 이팝나무가 벌써 하얀 꽃을 터트리고 있었으니, 일리가 있다. 그리고 대화는 꽃의 개화 시기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예년의 자료를 검색하여 짜 놓았던 일정이 틀린 것이 아니었는데.” 꽃의 시기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고 있음이다. 모든 꽃이 넉넉잡아 보름 정도는 일찍 피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모두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입니다. 이러다 꽃과 계절을 연관시킬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지요. 마치 열대지방처럼.” 그러고 보니 차창 밖 언덕에 보랏빛 칡꽃이 지천이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지난번 강릉의 큰 산불에 이어, 또 몇 곳에서 산불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올봄에는 유달리 많은 산불이 일어나는 것이 바람의 탓도 있겠지만, 가뭄 탓이 더 크다고 말한다. 물과 불은 상극이라 물이 부족하면 불이 성해지는 이치는 당연한 일. “위양지의 물은 그대로 있겠지?” 잠시 들린 어느 정자 연못의 누렇게 변해가는 연의 잎과 줄기가 애처로웠던 탓이다.


“맞아. 모두가 기후 탓이야.” 놀란 꽃은 점점 개화 시기를 당기고, 땅은 점점 메말라 가니, 기록은 무의미해지고 예상은 빗나간다. 문명은 어찌하여 사람이 꽃을 찾아 이 산, 저 들로 헤매게 만드는가? 문득 사람들이 말라비틀어진 연꽃 줄기처럼 애처롭다고 여겼다. 꽃을 찾는 마음이 무겁다. 어디 나뿐이었을까?


하지만 밖을 보니 아직 사월의 숲은 온통 연둣빛이다. 가뭄 속에서도 숲은 왜 푸르른가? 숲은 하늘과 물의 성질과 징후를 잘 알 것이기에 우기에 물을 충분히 머금고 있다가, 가물 때에 서서히 내어놓는 지혜를 발휘하겠지? 자연은 기후의 변화조차 스스로 조절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나, 다만 그 질서를 파괴한 것이 사람들이다. 문명이란 명제를 앞세워 개발에만 박차를 가한 어리석음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따름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가뭄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내가 눈여겨본 부분은 도시가 물을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소순환 저류 방식’이라고 불리는 그 방식은 우기의 물을 도시가 일정 시간 품고 있다가 서서히 내어놓음으로써 가뭄과 홍수 등 도시 재난을 예방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실험되었고, 세종시 등 우리나라의 신도시에도 일부 적용했다 한다. 자연의 힘을 뒤늦게 발견한 인간의 노력이 처절하였지만, 땅의 본성과 인간의 지혜가 만나는 멋진 순간이었다.  


위양지에서 나는 “아~ 얼마 만에 보는 흙인가?” 하던 오래전 기억을 더듬고 있다. 인도의 보수를 위해 보도블록을 걷어낸 흙길이 오히려 경쾌하였던 것이다.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올라온 민들레 한 송이를 보고 사유한 어느 작가의 관찰 또한 떠올렸다. ‘질긴 생명력도 대단하거니와, 민들레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려는 땅의 의지야말로 송고한 것이다.’ 위치를 바꿀 수 없는 식물을 향한 땅의 주문이 그러했다면, 땅을 디디고 살아야 하는 동물의 원동력은 어느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는가? 내 삶을 돌이켜 보더라도 맨 처음 땅 위를 걷게 된 순간만큼 의미 있는 순간이 또 있었을까? 생각한 것이다.

 

도시에서 땅이 사라진 일은 비극이다. 흙의 냄새는 먼 기억 속이다. 이제는 개발에도 자연과의 협업이 필요하다. 먼저 땅부터 살려내고, 거기에 물길을 열어, 다음으로 꽃을 심자. 옥상의 콘크리트 박스 안에 꽃과 나무를 담아놓고 마냥 흐뭇해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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