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은 책, 소설가 이순원의 산문집에 대한 아내의 평이다. ”이렇게 쓰니 얼마나 이해하기 쉬워! 요즘 들어 조금 나아지긴 했어도 자기 글은 어려워서 반 페이지를 넘기기가 수월치 않아.”
그러한 이순원의 산문은 이런 식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무얼 사 왔는데, 지금 그 물건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 세월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단순명료한 글인가? 그런데도 아내는 매번 글이 끝날 무렵이면 먹먹해져 한동안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단다. 문학의 목적은 감동이다. 내겐 화나는 일이지만, 글의 본질에 대한 아내의 주장은 옳았다.
합창단 단원인 아내는 집에서도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른다. 단원들에게 창피당하지 않으려 연습한다고 하지만 어지간하다. “당신은 우리 아파트에서 제일 노래 잘하는 사람이야.” 덕분에 오디오 틀 시간이 줄어든 나의 시비임을 모를 리 없음에도 아내는 별 반응이 없다. 이미 아내에게 노래는 시간 보내기 이상이다. 그리하여 아내의 노래가 FM을 대신하여 우리 집 배경음악이 된 지 오래다. “ ~ 오 미오 빠삐노 까로~ ”
40여 년 전, 결혼하고 나서 일어난 충돌의 하나가 음악감상의 문제였다. 단칸방이었으니 라디오 볼륨의 문제는 꽤 심각했다. "왜 그렇게 음악을 크게 들어?" "날카롭고 신경 쓰이지 않아?"
아내의 주장에 반하여 나는 쿵쿵거리는 음의 자극이 좋았다. 장르별로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앰프니, 스피커니, 오디오에 눈을 뜨던 시절이었다. 그랬으니 아내가 주장하는 배경으로서의 음악에 내가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무거운 오디오 장비에 베토벤 음반을 자주 올렸고, 반면 아내는 늘 FM에서 흘러나오는 바흐를 잔잔하게 들었다. 요즈음에도 수시로 음악을 크게 틀어 젊은 시절의 흥분된 감정을 되살리려 하니, 한때의 큰 즐거움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아내가 부재중일 때에 국한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빈도만큼은 확연하게 줄었다.
예나 지금이나 음반을 올려놓으면, 끝이 날 때까지 내내 신경 쓰이는 게 하는 것이 베토벤의 음악이다. 그의 음률에는 꼭 어깨라도 들썩이고, 지휘자처럼 팔이라도 한번 움직여야 한다. 그게 내가 베토벤을 대하는 태도다. 더더욱 크게 틀면 제맛이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차이콥스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들의 음악은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고, 무얼 생각게 하고 장면을 상상케 하고, 심하면 연주에 동참하게 한다. 그런 겉멋이 좋았다고나 할까?
한참 일을 하던 무렵, 사무실에서도 곧잘 음악을 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음악이 일에 밀렸다. 공간 또한 만족스럽지 못하니 예의 엄격한 베토벤 류의 음악은 엄두도 못 낼뿐더러, 수시로 전화를 받아야 하니 볼륨의 레벨도 2~3번을 채 넘어서질 못했다. 놀랍게도 아내가 주장하는 배경으로서의 음악은 실로 아내가 없는 사무실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셈이다.
사무실에서는 무슨 음악을 주로 들었을까? 어느 날 살펴보니 오디오 주변이 온통 아내가 듣던 바흐의 음반들이었다. 가끔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섞이기는 하지만, 바하의 음악이 대세임을 알았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의 주장에 따르면, 바흐 음악은 무척 수학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원칙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고. 듣다 보면 그 원리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그저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하면서 틀어놓은 바하의 음악은 한 번도 중간에 바뀌거나 중단된 적이 없었다. 1번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다 돌아가서야 끝이 났다.
기실은 나의 음악감상과 오디오 편력이 아내의 주장으로 인하여 무척 단순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음을 고백하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감상 태도에 대한 아내의 시비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쯤 수천 장의 음반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었을 거며, 오디오의 가격 때문에 아내와는 또 얼마나 다투었을까?
하지만 가끔 흥분하여 베토벤의 정열과 쇼팽의 감상에는 기꺼이 반응할지언정, 대체로 FM의 진행자가 고르는 음악을 낮은 볼륨으로 듣고 있으며, 베토벤의 교향곡을 바흐의 파르티타로 교체하고서도 곧바로 평정심에 들어 천연덕스럽게 일과 음악을 동시에 하게 되었더란 말이다.
최고의 성과는 20여 년쯤 전, 아이들을 키울 때였다. 두 아들을 포함한 우리 네 식구가 제각각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도 나의 앰프는 따끈따끈하게 열을 내리지 않고 한 식구처럼 늘 우리 곁에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의 ‘배경음악론’은 나보다는 두 아들에게 더 크게 성공하였으리라. 음악 자체보다는 그 음악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빠질 줄 알았으니, 음악이 더 가까이 온 셈이다.
나 또한, 음악감상에 대한 견해가 바뀐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20년쯤 전부터였나 보다. 열을 올리던 고급 오디오가 부럽지 않고, 몰두하던 음악의 장르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나의 음악 편력이 순해진 만큼 음악에 대한 나의 태도는 바하의 평균율만큼이나 편안하고 잔잔해졌다. 세태가 좋아져 신경이 쓰이던 음반이나 CD 라이브러리에 대한 욕심 또한 사라졌으니 다행이다.
무엇보다도 대견한 것은 음악에 대한 내 태도의 진보다. 아내의 합창 연습곡을 대가들의 연주와 동격으로 듣게 되었으니, 아내가 이 말을 들으면 뛸 듯이 기뻐할 테다. 그 기쁨이란 자신의 연주 실력에 대한 칭찬이기보다는 사십 년 가까이 음악의 본질에 대하여 가르친 그이의 보람일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마침내 아내에게 고백하였다 “사십 년 동안 당신은 나의 바흐였소.” 돌아서는 아내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흥분할 만했다. “ ~ 오 미오 빠삐노 까로~ ”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말했다. “하지만 글에 대하여 이순원과 비교하는 것은 당분간 유보해 주시오. 내가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40년이 걸렸는데, 글에 대하여도 그만큼의 시간은 주어야 할 것 아니오.” 한 10년이 더 흐르면, 그땐 아내에게 말 할 수 있을까? “그대가 나의 이순원이었소.”라고.
*이순원 / 나와 동갑인 강릉 출신의 소설가, 본문 중의 책은 그의 산문집 ‘은빛 낚시’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