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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Dec 19. 2023

건축공감

그림 이종민


나는 ‘공감’이란 이름이 붙여진 지면의 한 공간에 꽤 오랫동안 글을 써 왔다. 매번 그 공간의 이름인 ‘공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글의 주제로 삼고 있는 도시와 그것을 이루는 건축에 독자들을 얼마나 공감하고 있었을까?


건축이 공감해야 할 대상이란 개인인가 대중인가? 사용자인가 건축주인가?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 가는 사회나 문화에까지 범위를 넓혀가야 하는 것이 공감하는 태도인가? 아니면, 애당초 건축이 필연적으로 공감해야 했던 자연. 더 정확하게는 환경과의 공감을 말하는가? 라는 질문이 늘 내 글 주변을 맴돌았다.


어쩌면 내가 말해온 건축이란 단어 속에는 늘 공감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두 단어를 붙여서 읽어 본다. 건축공감, 참 아름다운 명제이며, 소리내어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마르쿠스 비투르비우스 폴리오 (Marcus Vitruvius Pollio)가 건축의 본질을 견고함(firmitas), 유용성(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이라 정의해 놓은 후로, 건축가와 건축학도들은 구조, 기능, 미를 건축의 3대 요소라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원초적 기능의 요구로 건축의 필요성이 생겼다면, 그 결과물이 점점 완벽한 모양으로 완성되면서 사람들은 그 물체 자체의 아름다움울 추구하였으니 이른바 건축미라는 것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건축은 아름다워야 하는 물건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기능과 아름다움은 건축 공감의 중요한 뼈대다. 건축이 개인의 셀터(shelter)로부터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더 큰 물건으로 발전함으로써 공감의 필요성이 생겼다면, 더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시각적 대상이 되고부터 건축미는 공감의 최종 목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구조라는 말은 어떤 공감의 의미를 내포하는가? 구조란 건축을 이루는 뼈대를 말하는 것이며, 건축이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견뎌야 생명력을 지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공감은 여기로부터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환경, 처음부터 그것은 극복이라기보다는 타협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그 아름다운 타협이 또 다른 조화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이 진정한 공감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우리의 건축이 공감을 위해 어떻게 흘러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비관적이다. 이른바 ‘절름발이 건축의 시대’를 말한다. 개발론자들의 이름으로 시행된 무수한 사업은 표면적으로는 시민과의 공감을 내세웠지만, 대체로 비문화적 건축을 양산하였다. 공감 주체들의 대화는 실종되고 강요된 건축이 도시를 채우고, 이제 그 괴물들이 만들어 낼 후유증에 시달릴 차례이다.

 

다행인 것은 건축공감의 필요성에 대한 시민의식의 진보이다. 건축공감은 지나간 것이거나 남의 것이 아닌, 지금 이루어 가고 있는 주변의 건축 행위에 있음을 시민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한때 건축 관계자들의 잔치에 머물러 있던, 건축문화제와 건축상의 시상이 시민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음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하나의 건축을 앞에 두고 말을 주고받으니, 건축에 공감하려는 것이다.


건축문화제를 보고 나오면서 문화적 풍요를 상상한다. 거리를 거닐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무던히 대화했음 직한 건물을 우연히 만나 잠시 서게 된다면. 그리고 어떤 행복에 잠긴다면 새로운 건축문화가 이루어지려는 것이다. 더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의 도시에도 건축공감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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