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바닷가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여러분은 저 모두를 사랑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 대상을 사랑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삼삼오오 앉은 우리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게 되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늘과 바다의 만남만큼 운명적인 것이 있을까? 둘이 만나지 않으면 풍경은 완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 그림 모두가 거기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들이 만나는 지점에 서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에 터무니없이 역부족이다. 애를 써 확인할 도리도 없다. 다만 그것을 그릴 뿐이다.
풍경을 그릴 때마다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구름이나 태양의 조력을 받으며 늘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대한 사람들의 묘사 또한, 하늘 자체이기보다는 그 밑에서 떠도는 조력자인 구름, 비, 햇살과 같은 것들의 묘사이기 일쑤다. 마치 그릇에 담긴 물은 형태란 알고 보면 그릇의 형상인 것과 같이.
나는 하늘만큼은 억지로 그리지 말고, 물과 물감의 흐름에 맡겨 놓으라 말한다. 맑은 물에다 감정을 섞은 약간의 색을 풀어 놓고, 그들이 섞이며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결과를 기다리라 말한다. “그림은 종이와 물이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만, 종이를 준비하고 마중물을 부어야 하는 조력자에 불과합니다.” 붓을 든 사람들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화폭의 절반을 차지하게 될 하늘을 어떤 물감으로 채울까?
다시 물에 집중한다. 화면의 나머지 절반을 물의 색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의 색은 무엇이 만드는가? 그것은 직접적인가 아니면 빛과 조합하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자연의 결과물인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나는 바다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고, 먼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가끔 하늘과의 경계에 시선이 머물기도 한다.
“가까운 곳의 색이 짙습니까? 먼 곳의 색이 짙습니까?” “바다에 나가시면, 유심히 관찰하십시오. 어떨 땐 수평선 가까이가 짙고 어떤 날은 내 발 앞의 물이 짙습니다.”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다시 들추어 본다.
내 그림 속 바닷물의 색은 석양이나 일출을 제외하고는 늘 푸른색에 약간의 녹색이 섞인 색으로 그려져 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저건 분명히 무엇이 비추어진 모습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바다 본연의 색임이 분명하다. 해초의 색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면 플랑크톤과 같은 미세한 것들이 뿜어내는 색일까? 물의 색은 무엇이 만드는가? 그것은 직접적인가 아니면 빛과 조합하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자연의 결과물인가?
중학교 과학 시간이었나 보다. 처음 들은 ‘산란’이란 말은 그 어휘가 주는 느낌만큼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빛의 3가지 속성 중의 하나라는 과학 선생님의 목소리를 저만치 하고, 나는 그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 보면서, 그 관념적이고 모호한 것의 실체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던지 모른다. 분명 다른 삼 요소인 직진, 굴절보다는 훨씬 품위 있어 보였음이 분명하다. 이후 내가 사진에 몰두하던 시절에도, 나는 그것의 실체를 붙잡으려 얼마나 애를 썼던가?
심연에서 뿜어져 나와 바다의 미세한 경로를 거쳐, 공기 속으로 튀어 올라 마침내 하늘에 다다르는 모종의 에너지. 하늘은 멀고 물색이 짙으니 가을이 왔다. 운명적으로 만나는 바다와 하늘. 그 평화로운 경계의 아래, 위에 숨어 있는 형태의 비밀과 빛의 산란. 나는 그것을 그려내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