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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Jun 16. 2022

청사포에 부는 바람

부산을 말하다

그림 이종민

갯마을 사람들은 무시로 고개를 들어 재 너머를 바라본다. 등 뒤로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건만 반대 방향을 향한 그것은 동경이며 그리움이었으리라. 밖으로의 통로인 거기, 재를 넘어온 사람들도 한눈에 마을을 담았을 것이니 유일한 소통의 창구이지 않았을까?


남해 가천의 다랭이 마을로 드는 초입에서의 느낌이 이와 같았다. 거기나 여기나 길이 넓어지고 자동차가 늘었으니 외지인들의 손길이 드세어지고 토박이의 인심 또한 예전 같지 않음을 어찌 탓하랴. 갯마을로 드는 초입에서는 늘 그런 아쉬움에 휩싸이니 아마도 또 다른 갯마을 출신인 나의 숙명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내가 예전 못지않게 이곳을 자주 드나드는 이유는 풍광이 마음을 끌었다든지 특산물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의 친근과 소박함에 있었다. 넉넉히 30분만 더 투자하면 도시에서의 푸념 따위는 쉬이 잊을 수 있는 지근의 거리에 있기도 하고, 호기라도 부려 조개구이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면 잠시 배포가 부풀기도 하던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나의 동경에 일조한 것은 마을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청사포(淸砂浦), 한자의 뜻을 유추하면 푸른 모래 언덕의 마을쯤 일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입의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온통 푸른 바다의 빛깔이 시계를 점령해 버린다. 필시 금빛 모래가 지천이던 시절도 있었으리라.


청사포(淸蛇浦)라는 다른 이름이 유래되기도 한다. 용왕이 보낸 푸른 뱀이 기다리던 여인을 남편에게 데려다주었다는 전설은 이곳이 여지없이 무서운 바다와 싸워야 하는 남정네들의 삶의 터전이며, 숙명처럼 그들을 기다려야만 했던 아낙들의 인고와 그리움이 수백 년에 걸쳐 쌓이고 묵혀온 곳임을 말한다. 


그런 생각을 뒤로 구불구불 급경사의 옛 길을 조심해서 내려가면, 이제 기차가 다니지 않는 동해남부선 길을 건너고 방파제를 지나 바다에 다다른다. 마치 계단을 내려가 지하의 어느 곳에 함몰된 듯 오묘한 안온함이 온몸을 스치는 순간, 마침내 도시의 틀에서 무장해제 된 나는 온전히 바다로 스며든다. 늘 그리던 투명함과 푸름에 한껏 빠지기도, 등대 너머 동해의 물살을 헤쳐 보기도, 마음이 더 부풀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훈풍에 실려 먼 이국땅에 다다르기도 한다. 


나만 그럴까? 어머니의 손을 잡은 아이들은 서로 경쟁하듯 깔깔대고, 행인의 시선 피한 연인들은 몸을 더욱 밀착한다. 낚싯대를 던진 중년의 표정이 오랜만에 밝아졌고,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이 처녀처럼 곱다. 어쩌면 나는 그런 표정들을 관찰하며 나를 위안하기 위하여 이곳에 오는지도 모른다. 내 집에서 삼십분의 거리에 이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곳이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직 상업의 때가 덜 묻었다는 데에도 있다. 도심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보기 드물게 개발이 늦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발의 바람이 늘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왼쪽의 송정 구덕포와 오른쪽의 해운대 미포와 함께 삼포(三浦)라 불리면서 누군가가 개발의 시기를 호시탐탐 노린다고 할까? 동해남부선 철로가 걷히고 그 곳에 해변길이 들어선다면 어떻게 변할까? 산책길이 아니라 자동차 길로 변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리하여 못된 것들이 어둠을 업고 스멀스멀 숨어드는 장소로 변하면 어찌될까? 상상이 마음을 얄궂게 한다.


나는 이곳에 들어서는 찻집은 초록이나 갈색의 알파벳 이름을 단 이름난 브랜드의 커피숍이 아니었으면 한다. 주인이 손수 만든 간판이 해풍에 달랑거리는, 테이블이 너덧개 놓인 작은 커피숍에서 잠시 시간을 낸 연인들이 어깨를 기대며 휴식하였으면 한다. 그리 비싸지 않는 가격으로 조개와 장어를 실컷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이 더러 있었으면 한다. 가족이 대부분인 손님들 사이에서 소주 한잔을 들이켜며 오랜만에 호기를 부리는 중년의 모습이 백열등 불빛 사이로 간간히 비쳤으면 한다. 


나는 이 마을이 좀 덜 세련된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길 바란다. 오래된 작은 집들이 조금씩 수선되어 불편하지 않았으면 하고, 길이 깨끗해지고 불이 더 밝았으면 하는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차츰 받아들여지는 그런 마을이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이곳 사람들이 바다를 등지고 고개 너머로 이사 가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면 좋겠다. 또한, 동네 한복판 300년 망부송(亡夫松)에 이따금 걸리는 빨간 파란 리본이 내일 아침에도 펄럭였으면 한다. 그리하여 지나는 아낙과 사내들이 문득 사랑과 그리움, 심지어 운명 따위에 대하여 설왕설래 떠들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나 같은 사람의 이러한 염원이 현실적이지도 영원하지도 못할 일이라 하여 탓하고 조롱하는 야박하고 현실적인 세상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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