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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Jun 28. 2022

'중앙공원'에서의 생각

부산을 말하다


그림 이종민


도시의 상징이란, 공원이란 이름으로 도시를 품거나 때론 탑이나 전망대의 모습으로 우뚝하기 일쑤다. 다른 지역 사람들을 향해 가장 함축된 기호가 되는 그것, 거기엔 지역 특질이 표현되고 때에 따라서는 지역민의 염원이 담기기도 한다. 마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이나 ‘도쿄 타워’에서처럼 어쩌면 도시의 기억은 그 선언적인 상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것과 무역의 관문이라는 사실이 이 도시를 풍요롭게 가꾸었다면, 구국과 민주화의 과정은 시민의 뼈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부산 사람들이 ‘중앙’이라는 직설적 은유를 내걸고 이 아름다운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는 것은 먼 바다를 건너는 연어의 회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충혼탑’에 이르는 길

높은 계단 혹은 병치된 긴 경사로를 걸어서 올라야 한다. 마침내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그것은 ‘숭고’라는 하나의 크고 명징한 단어로 쿵~하고 내 앞에 내려앉았다. ‘충혼탑’ 이 감동적인 구축이 나와 같은 건축가에게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 선생이 남긴 조형이라는 것에 있다. 엄격한 노출 콘크리트의 조형은 ‘유엔묘지 정문’과 더불어 선생이 부산에 남겨준 선물과도 같은 건축이다.


선생은 구국 혹은 애국 행위에 당면하려는 참배객들에게 “당신네는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어떻게 표시하려는가?” 라는 호된 질문을 던지고 싶었나 보다. 그렇듯 통과의례와도 같은 ‘의식의 길’을 오르는 과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향을 사르는 일과 묵념을 하는 것만이 모두가 아니라, 숨을 할딱거리며 올라야 했던 이유가 또 있었다. 이곳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는 느낌은 ‘용두산공원’의 전망대나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느끼는 가벼운 감동과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무릇 제 스스로 오르지 않고 내려다볼 대상이란 없는 것이다.

마침내 탑을 뒤로하면 공원의 전역이 눈에 든다. 아래로 ‘민주항쟁기념관’ ‘광복기념관’ 건물을 포함하는 ‘민주공원’의 전모를 한눈에 바라보게 됨으로써 이곳의 시공간적 의미를 짐작해 보는 것은 시민으로서 의미 있는 일이다. 



‘민주항쟁기념관’의 가벽

현실이라는 벽을 통과하여 다른 세계로 잠시 들어가는 과정이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라면, 건축가는 문(門)이라는 건축적 어휘로 긴장을 이완시키기도 흥분을 부축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門)은 종종 시공간을 통제하는 하나의 개념이 된다.


‘민주항쟁기념관’에 들어서려면 가림막처럼 둘러진 앞마당의 가벽을 지나야 한다. 벽이 중단되고 사각의 장치 통과하면, 문득 외부로부터 차단됨을 깨닫게 되고, 그 적요 속에 나의 사념은 1979년의 가을 온천장 거리로 되돌아간다. 조형과 건축엔 아무런 강요된 장치가 없다. 그러나 통과하는 순간 30년 전 ‘부마항쟁’ 그 역사적 함성이 순식간에 내 귓가로 다가오며 내 피는 다시 끓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물을 보는 눈은 사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누군가에게는 문이 될 수 없는 그저 단절된 하나의 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광화문, 숭례문, 혹은 독립기념관 정문에 못지않은 훌륭한 문임이 틀림없었다. 그 치열했던 사건도 내 생애에서 하나의 문(門)이었을 것이다. 나는 ‘민주항쟁기념관’ 가벽의 문(門) 안에서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 



소담한 ‘광복기념관’ 

공원의 한쪽에는 마치 공원관리소라고도 오해될 법한 소담한 건물이 하나 있다. 건축가 ‘정연근’이 설계한 ‘광복기념관'은 ‘광복회’에서 전시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부산 근대 역사관’과 이분되고 겹치는 자료여서 내용이 초라하다는 불만이 있겠다. 하지만 광복 지사들의 후예들이 여전히 열정적으로 유지하고 애쓰는 것을 보면, 역사와 그 평가란 그저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곳 또한 치열한 곳이다. 반면, 느긋한 나로서는 이 작은 건축이 이루어낸 건축적 어휘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고나 할까?


이처럼 ‘중앙공원’에는 환영과 희망이 뒤섞인다. 묻혀있던 것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우치기도 하고, 때론 잊고 있었던 아픈 마음을 새삼 건드리기도 한다. 격동의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느리게 걸으며 회한에 잠기기도 하며, 학습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들의 입과 눈이 바쁘기도 하다. 도시는 액자 속에 잠길 풍경이 아니라 공이 굴러야 하는 운동장과 같은 곳이다. 현존하는 말과 지나간 글, 사진이 격이 없이 공존하는 이곳은 타 도시의 기념관들처럼 무거운 상념이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아서 좋다. 


앉기도 잘 앉았다. 어디를 향해서건 탁 트여 기(氣)가 돌고 늘 푸르러 가장 부산다운 곳임에 이론이 없다. 삶에 지치면 뜬금없이 올라와 먼바다를 향해 팔을 벌린다거나 옹기종기 앉은 집의 빨간 지붕을 관찰한다는 것은 이 도시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의 풍요다. 그렇다면, 가히 이곳은 부산의 상징이 될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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