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과 미술시장의 지리학
고요한 황혼녘, 빛바랜 공장 지대 위로 노을이 드리웁니다. 한때 굉음으로 가득 찼던 거대한 작업장과 물류 창고들은 이제 쓸쓸한 침묵에 잠겨 있습니다. 한 국가가 제조업 중심의 산업형태에서 벗어나 탈산업화의 물결을 맞이할 때, 이처럼 비어진 공간, 즉 '공동화된 유휴지'는 마치 폐허처럼 남겨집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 비어진 캔버스 위에서 놀라운 재창조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을요. 바로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의 마법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유휴공간들은 단순한 낡은 건물이 아니라, 문화의 씨앗을 품고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탈바꿈합니다. 도시 재생은 쇠락했던 산업 도시를 문화적 심장이 뛰는 관광 도시로 체질 개선하는 위대한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선율: 도시 재생의 교향곡>
20세기 중반, 뉴욕은 산업의 도시에서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맨해튼 남부의 소호(SoHo)는 그 상징적인 무대였습니다. 방직공장과 창고가 즐비했던 이곳은 산업의 쇠퇴와 함께 공동화되었고, 시는 이 지역을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도시계획 자문단은 예술가들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공간을 제공하자고 제안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자생적 예술가 집단의 유입은 도시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선두에 섰던 도시 뉴욕이, 산업화의 파고가 가장 먼저 밀어닥쳤던 그곳에서, 탈산업화 시대를 맞이하며 공동화된 도시를 새로운 선진국의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선구적인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뉴욕이 그려낸 이 변화의 패턴이 이후 수많은 도시에 의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반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뉴욕의 도시 재생은 마치 7악장의 교향곡처럼 전개되었습니다.
1. 첫 번째 악장: 예술의 씨앗을 뿌리다 (10년 주기 시작점)
한때 도시의 번영을 상징했던 방직 공장이나 제조 공장들은 이제 폐허처럼 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이 공간들을 모두 허물고 아파트와 주상복합 단지를 구상했지만, 지혜로운 자문을 통해 기적과 같은 아이디어가 태동합니다. 바로 예술가들에게 이 저렴한 공간을 임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싼 임대료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술가들이 자생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유롭게 예술 활동(소프트웨어)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2. 두 번째 악장: 활기 넘치는 갤러리의 등장
예술가들의 에너지 넘치는 활동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습니다. 탐방객과 새로운 예술가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작업 공간 옆으로는 작은 화방과 갤러리들이 컬렉터들과 함께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3. 세 번째 악장: 사교와 영감의 공간, 카페와 살롱
예술과 사람이 모이는 곳에 문화는 더욱 풍성해지는 법입니다. 따뜻한 커피와 담소가 오가는 카페와, 예술적 영감을 나누는 살롱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도시는 더욱 생기 넘치는 공간으로 거듭납니다.
4. 네 번째 악장: 다채로운 문화 산업의 유입
예술적 활력은 다양한 문화 산업으로 확장됩니다. 개성 넘치는 카튜닝 샵, 벽을 도화지 삼아 자유를 표현하는 그래피티, 열정 가득한 공연 연습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영화 관련 스튜디오, 그리고 창조적인 디자인 및 건축 사무실들이 이 새로운 문화 거점에 둥지를 틀기 시작합니다.
5. 다섯 번째 악장: 젠트리피케이션의 역설
활성화된 구역은 필연적으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상업적 가치가 상승하고, 이내 임대료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본래 이 공간을 깨웠던 예술가들은 다음의 비어 있는 구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는 도시 재생의 피할 수 없는, 그러나 안타까운 순환고리입니다.
6. 여섯 번째 악장: 거대 자본과 명품의 물결
예술가들이 떠난 자리에는 거대한 자본과 명품 샵들이 들어서며 거리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합니다. 한때는 실험적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상업적인 트렌드의 최전선이 되는 것입니다.
7. 일곱 번째 악장: 새로운 공동화 구역의 탄생 (재시작)
하지만 이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도시의 외곽에서는 새로운 공동화 구역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다시금 새로운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위와 같은 도시 재생의 패턴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 패턴은 대략 10년 주기로 이어지며, 처음 예술가들의 자생적인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미술 시장 역시 함께 성장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미술 시장의 대륙 이동: 시대의 흐름을 읽다>
팝아트의 유행과 함께 대량의 작업을 수행해야 했던 예술가들에게 넓고 저렴한 공장, 창고 지대는 최적의 작업 환경이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 예술가들이 집단화되고, 이에 따라 갤러리스트와 컬렉터들이 주목하고 모여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미술 시장의 패권은 시대와 자본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 왔습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그리스 로마 예술이 파리에서 꽃피웠고, 몽마르트 언덕이 미술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자 그 명성은 거대한 자본과 산업 사회의 영향을 받은 뉴욕으로 옮겨갔습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찰스 사치와 데미안 허스트를 중심으로 한 전위적인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의 활동과 킹스크로스 도시 재생, 그리고 화력 발전소가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테이트 모던의 영향으로 미술 시장의 패권은 다시 유럽으로 넘어왔습니다. 1990년대에는 독일 통일 후 동베를린의 미테 거리가 저렴한 임대료와 신선한 이슈 덕분에 전 세계 예술가들을 끌어모으며 또 다른 도시 재생의 패턴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베이징의 798 예술 구역과 송좡 예술촌이 이와 유사한 패턴으로 개발되며, 뉴욕과 유럽이 양분했던 미술 시장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2012년 이후 중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미술 시장의 중심은 홍콩과 상하이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4년부터 시작된 서울의 도시 재생 노력과 함께, 2022년 프리즈(Frieze) 유치는 서울을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선진국의 지표: 고부가가치 산업과 문화 예술>
결론적으로, 한 국가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시점은 명확해 보입니다. 바로 제조업 중심의 산업을 벗어나 고부가가치 미래형 산업을 추구하게 되는 시기이며, 동시에 산업 도시를 문화 예술 관광형 도시로 체질 개선해야 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진 선진국에서 미술 시장이 이토록 활발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프리즈 유치 이전, 국내 시장에만 통용되는 미술 시장의 한계를 벗어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대주의적,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역사 왜곡이 미술사에도 적용되어 왜곡된 미학관을 주장하거나, 한국성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던 아쉬움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이제 선진국에 진입하여 높아진 소득 기준에 따른 일시적인 호황을 넘어, 진정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한국 미술만의 명확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때입니다.
향후 10년 주기로 새로운 미술 시장이 개척될 것이며, 이러한 도시 재생과 선진국 진입의 과정을 겪을 가능성이 큰 국가로는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유력해 보입니다. 그들의 도시가 새로운 문화의 심장으로 다시 태어날 순간을 기대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예술적 선율이 울려 퍼질지 지켜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