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묵돌이 종이로 새겨진 긴 글을 써냈다.
단독 신간을 기준으로는 약 388일 만이고
장편 소설을 기준으로는 무려 1,794일 만이다.
5년 전, '어떤 사랑의 확률'은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기는 했으나
내가 이묵돌에게 기대했던 맛과는 사뭇 달랐다.
그 이후로 계속된 단편소설과 수필들을 꾸준히 읽으며 함께 성장했다.
특히, 이묵돌 특유의 비극을 담담하게 풀어내
어긋남 없이 결말과 맞닿게 되는 표현과 구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단편소설에서 더욱 부각되는 이러한 부분은
글은 빠르게 읽힘과 대비적으로 생각은 오래 하게 만드는, 이중적인 글이 매력이다.
이묵돌은 다년간의 다작을 통해 드디어 장편을 세상에 내보였으며
그러한 능력이 비단 짧은 글에서만 발휘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서야 이묵돌은 단편을 넘어 700페이지 두꺼운 장편소설 작가가 되었다.
이묵돌은, 그동안 책의 길이가 너무 짧아 금세 읽어버리고는 '더 달라고' 소리치는 독자들이 많은데
이번에는 그 욕구가 어느정도 충족되리라 라고 답변했지만
막상 읽어보면 712페이지- 무려 306장이나 되는 종이를 넘기는 데에는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글의 몰입도를 과소평가했거나 독자들의 사랑을 과소평가했거나.
어쨌거나 둘 중 하나다.
기회삼아, 오랜만에 책 리뷰로 글을 써보려 한다.
자세하고 분석적인 글은 아니고, 그저 조그마한 감상이다.
줄거리는 핵심만 간략하게.
불행하게도 주체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 여자와
그 여자를 만나 꽤나 괜찮은 감정적 교류를 하는 서투른 남자.
하필이면 그 남자는 악성 덩어리를 원인으로 추정 가능한,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있다.
진심으로 후회할 때만, 후회되는 시점으로.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 맹렬히 후회한다.
끝없이 돌이키며 맞닥뜨린 종국에는 과연 그녀가 있었을까.
아래 가벼운 서평을 남긴다.
축하한다.
당신의 영혼을 담은 700페이지 남짓의 새로운 명함은
그 이름값을 하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결과적으로 근사한 호크룩스가 되었다.
당신의 명함 아니랄까봐, 후반부 '산'의 공산주의 찬양이 아주 인상깊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산 대신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읽혔다.
급기야 이묵돌이 소설 속 인물에 직접 투영하여 노동과 혁명에 대해
예찬론을 늘어놓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후반부에 이르러 해도의 사랑에서, 그 배경이 될 뿐인 체제 경쟁으로,
주/부가 역전된 느낌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다.
<초월>은 여타 다른 글들이 그래왔듯이
한 문장 걸러 한 문장마다 등장하는 깊숙한 비유들을 토대로
어떠한 감정선에 함께 도달하게 만든다. 다만 더욱 농익은 채로.
가학 포르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참하게 그려낸 민진의 삶은 끊임없이 불쾌하였으며
그 불쾌는 후반부 해도의 좌절과, 이를 유발하기 위한 산의 일갈과도 선명하게 맞닿아 있다.
사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안타까운 삶을 살게 했어야 할 이유까지는 모르겠다.
필요 이상으로 인물의 입체성을 내밀하게 다듬었기에,
시간을 돌린다는 다소 맹랑한 주제 속에서도 이입이 어렵지 않았다.
민진도 결국, 해도와는 다른 의미로 버티고 또 버티고 결국 초월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시간과 장의사'와 고양이까지 가득한 이스터에그는 괜시리 반가웠다.
중간중간의 ‘여로’에서 배워온 듯한 러시아어를 해석도 없이 지껄여놓은 점은,
영화 ‘루시’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최민식의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공포와 궁금증을 묘사하기 위해 일부러 자막을 입히지 않은 장면이 투영됐다.
그럴 의도가 아닐지라도, 이를 일일히 챗지피티에 넣고 해석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 같아
그냥 알아들을 수 없는 키릴어로 남겨두었다.
설마 하릴없이 독자를 욕하는 글은 아니었으리라는 확신만을 가진 채.
결국에서야 소설의 이름이 초월로 확정되었다는 것은
그 투쟁의 과정이나만큼 결과적으로도 훌륭한 선택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 시간과 사랑, 혹은 그 무엇인가에 잔뜩 초월해버린 남자도
자신의 초월적 이야기가 결국 ‘초월’로 버텨내졌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도연을 초월하여 민진을 지나 효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초월하여 도연에 잠시나마 스치기까지.
해도의 열렬한 후회와 상실은 비로소 그 끝을 맞이한다.
무참히 스러지며, 종국에는 악인까지 오롯이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과연 후회하는가.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다시금 후회하는가.
인간의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후회는 가히 필연적이다.
후회는 후회로써 빛나며, 남겨진 기회의 기회가 된다.
편집된 비선형적 시간이라 한들
당신은 후회없는 사랑을,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후회가 없는 사랑이 가당키나 한가.
사랑은, 어쩌면 그 끝이 다를 수 있음에도,
쉼없이 무너짐에도 올곧이 버티고 설 수 있는 힘.
당신은 힘겹게 사랑을 버텨낼 준비가 되었나.
애타게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랑일 수 있는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 구원의 원천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은 그 자체로 초월의 종류이다.
비효율과 무지성에 휩싸여 나 자신을 초월한 감정이다.
우리는 왜 초월하려 하는가?
초월을 위해 무엇을 감내할 수 있는가?
정말 초월할 수는 있는가?
<초월>은 여전히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질문을 끝내 붙잡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묵돌은 이번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자와 오래 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답을 좇아, 부단히 초월하려 분투하는 우리네 몸부림이,
이미 초월에 가깝게 닮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완성되는 초월일지도.
어떤 초월의 확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