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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음조각가 Dec 21. 2021

나는 점점 녹아내리고 있다

감정페르케 _ 용서하지 못할 것만 사랑했다

골목을 걷는다. 골목의 허름한 계단은 며칠 전 내린 눈을 잘 기억하고 있다. 골목의 일이다. 눈은 햇살이 들면 곧 사라질 것이다. 이 또한 골목의 일. 하얗게 덮인 눈을 바라보며,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 지구상에 살았던 공룡들 또한 그러했겠지. 멸종을 거듭하는 것들은 이렇게 마음이 소박하고 경이롭다. 따지고 보면, 이 눈은 하늘의 발자국. 계단 위에 쌓인 눈은 발자국의 무늬. 가위바위보를 해본 뒤에야 보이는 풍경의 높낮이. 놀랍지 않니? 기억이 녹고 있다는 사실이. 태도란 결국 녹는다는 사실이. 끝까지 고집할 자세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그래, 이 세상에 없는 것만이 자세가 된다. 평소 안 쓰는 마음을 데불고,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사람처럼 뺨을 내밀고 눈 덮인 계단에 앉는다. 나는 계단의 자세를 배우고, 눈의 온기를 느끼면서, 점점 녹아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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