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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음조각가 Apr 29. 2022

풀의 지문

감정페르케 _ 용서하지 못할 것만 사랑했다

풀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물을 엎지른 듯 바닥에 엎드린 풀의 그림자. 땅을 덮고 있는 풀의 그림자. 슬픔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그림자. 마흔이 넘고서는, 그림자를 통해 그림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런 다짐으로 저녁 산책에 나서면 어김없이 내 목덜미를 붙드는 막막한 마음. 뒤돌아서면 기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사라진 자리에 그리움만 남는다. 그림자가 머물렀던 자리에 나 홀로 서서, 가난처럼 죄를 씻고 나면 다시 풀이 자랄까. 낫으로도 베어낼 수 없는 미움. 풀들의 이름을 모아 그림자의 나라에 세 들고 싶지만, 지금은 풀 조차 풀이 죽는 계절. 풀이 왜 나이테가 없는 줄 아니? 무엇이든 한 번뿐이기 때문이야. 바람과 바람을 엮어 생의 지문을 형성하기 때문이야. 그림자의 얼굴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면, 풀잎에 손을 베어볼 것. 나이테도 없이 맺히는 풀의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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