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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음조각가 Jun 27. 2022

슬로우슬로우 싱겁게

감정페르케 _ 용서하지 못할 것만 사랑했다

비를 담은 바람이 분다. 작은 소쿠리 같은 바람. 갈 길 잃은 나뭇잎과 꿈을 잊은 꽃잎이 한데 모여 뒹군다. 인사를 나눈다. 서로의 안부가 바스락거린다. 주뼛거린다. 구두를 구겨 신을 용기도 없이 나도 따라 주뼛거린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여기까지 찾아오셨소. 나뭇잎은 꽃잎처럼 웃고, 꽃잎은 나뭇잎처럼 웃는다. 하루만 살겠다고 마음먹어야 들리는 대화의 그늘이 귀에서부터 싹을 틔운다. 하늘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자자, 우리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자리 옮겨서 편하게 이야기합시다. 약속은 또 다른 바람을 부른다. 그 바람에 나도 길을 잃고 꿈을 잊는다. 이번 생은 아예 쪼그리고 앉은 형형색색의 바닥이 된다.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도 없는 바닥. 비가 내리면 금방 자취를 감출 바닥. 밑줄을 그으면 금방 속이 들통날 것 같은 바닥. 나는 슬픔처럼 다시 일어나 비를 담은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이 불어 다음 바닥을 넘길 때까지 종종거려본다. 허나, 지금은 바람조차도 갈 곳 여름 없이 헤매는 계절. 끝내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봐야겠다.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슬로우슬로우 싱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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