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잘 싸웠으면 됐다
집 청소 중에 수납함을 정리하면서 위워크에서 썼던 업무노트 3권을 찾았다. 곤색, 검은색, 초록색의 몰스킨 노트다. 촤르륵 훑어보니 한 주, 하루 단위로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고스란히 적혀있다. 한 자 한 자 곱게 쓴 업무 일지부터, 알아보기 힘들게 갈겨쓴 글, 그리고 알록달록 형광색 밑 줄들의 향연이다. 사회 초년생이 일터에 나가 고군분투했던 생생한 기록들이었고, 하루하루 용감히 이겨내려는 흔적들이었다.
첫 업무를 맡았을 때가 18년 6월이었는데, 내 일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일 자체도 생소했고, 빠르게 움직이는 속도에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신을 못 차렸던 기억들이 있다. 그때 혼도 많이 내주시고 나의 우당탕탕스러운 업무 스타일을 냉정히 꼬집어주신 당시 매니저님께 감사한 마음이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수습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충격요법 덕분에 이렇게 매일 업무노트를 작성하는 습관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업무노트에는 다른 업무노트들과 다른 점이 있다. 내 업무노트의 주간 스케줄 페이지 윗 칸에는 그 주의 각오가 있다. 어떤 주엔 나만 알 수 있는 단어, 어떤 주엔 명확한 의미의 문장을 쓰기도 했다.
이 칸은 내게 개인적이고 신성한 공간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나는 부정적인 상황에 틈을 보일 것이고,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무의 바쁨을 떠나, 내 마음에 휘몰아치는 여러 감정들, 지금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잡 생각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나를 압도하려는 외부적인 것들에 위축되기 싫었다.
그렇게 의식적인 글들을 남기다보니, 업무를 일방적으로 기록하는 노트가 아닌, 열어볼 때마다 나에게 말을 거는, 약간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노트가 되기 시작했다. 나를 응원하는 노트, 내 기분을 환기시켜주는 노트. 어쩌면 이준우가 살아가는 데에 무관할 수 있는 회사 일인데, 작은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내 브런치 제목 ‘jab & wrestle’처럼, 일(work)은 스포츠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경기 시간 동안 상대팀과 자웅을 겨루듯, 정해진 업무 시간에 집중력을 유지해서 오늘의 목표(=승리)를 달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출근길, 사무실에 올라가는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곧 시합을 앞둔 운동선수가 된다. 마음을 잡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나는 외적인 변수를 신경 쓰지 않고 이상한 근자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마치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게 된다.
부동산 업계에서 나와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째다. 그때보다 더 높은 리그에서 더 높은 난이도의 상대들을 만나는 기분이다. 일을 진행하면서 걱정이 많아지고, 내가 하는 이 방식이 최선인지도 잘 모르겠다. 여기저기 얻어터지는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내 수첩 위에서 의식을 치른다. 나 스스로 멘탈 코치가 되어준다. 겨우 이것으로 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누구나 일을 완벽하게 하고 싶고 매일 이기고 싶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졌잘싸,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마음 무장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미리 걱정을 하고 겁을 먹을 이유가 작아진다. 내가 허용하지 않는 이상 내 영혼을 부러뜨릴 수 없다.
일의 철학(work ethics)에 큰 영향을 끼치셨던, 교세라의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가 저저번 주에 서거했다. 뼛속까지 기업인이셨던 이 분은 생전에 일과 회사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다. 그의 글들은 ‘왜’, ‘어떻게’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치열하게 잡고 늘어지는데, 야생성과 대단한 남성미가 느껴진다. <왜 리더인가>에서도 일을 할 때 기세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어떤 일이든 무조건 해내겠다는 투지, 즉 바위를 부술 것만 같은 기세야말로 성공의 전제 조건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내가 애정 하는 장면은 기우(최우식)와 다혜(정지소)의 첫 과외 수업 씬이다. 뒷 문제를 풀다가 앞 문제로 다시 넘어간 다혜에게 기우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지금 실전 수능이고 이게 첫 문제였으면 넌 시작부터 완전 엉킨 거야. 시험이란 게 뭐야, 앞으로 치고 나가는 거야. 그 흐름을 그 리듬을 놓치면 완전 꽝이야. 24번 정답? 관심 없어. 나는 오직 다혜가 이 시험 전체를 어떻게 치고 나가는가, 장악하는가, 거기만 관심 있다. 실전은 기세야, 기세.”
essay by 준우
photo by 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