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b n Wrestle Mar 16. 2021

삐빅! 평균 인간입니다

이 시대의 표준 인간

베이비부머인 우리 부모 세대의 삶과 밀레니얼 세대 나의 삶이 얼마나 다를까? 기회가 되면 부모님 청년때는 어떤  평범한 삶이었는지 물어보라. 아마 열중 아홉은 졸업하면 직장 잡아 조직 생활에 충실히 적응하고, 꾸준한 예금으로 자가 마련에 적당한 배필 만나 결혼  키우며 살다가 정년을 맞는 삶이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 하실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이신다. 요즘은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제일 어렵다고. 평범한  어렵다면 과연 그게 범한게 맞을까? 평범한 삶이란게 평균의 삶과는 다른 것일까?


#라떼 가 있는 이유는 기준이 달라서다


화자가 지 자랑을 할 때를 빼면 “나 때는..” 은 당 시대의 평균적인 단면을 알 수 있는 고증이다. “우리 때는...”이란 즉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지금은 그게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때 유행하던 시대상, 삶의 양식이 지금은 구식이 되었다는 말과 같다.


 먹고  낳고  사던  우리 엄마 아빠  평범하고 안전한 노말 코리안 라이프 코스였다.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기르자는 산아제한 정책, 대학 졸업  원하는  골라 들어가던 취업 시장,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높아지는 수출의 탑과 시중 금리, 그리고 아파트 개발 붐이 불면서 굳어진 33평의 시멘트 아파트가 우리 삶의 표준이 되었다. 삼성과 대우, 그리고 당시 럭키 금성의 백색 가전제품들의 공급에 맞춰 거실엔 티브이와 맞은편에 있는 소파가 인테리어의 표준이 되었다. 당시 표준 인간의 삶은 하면 도시 아파트에 사는 4~5 핵가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표준 인간은 변했다.


부모님들은 연애  하라고 한다. 그리 좋은 대학 생활을 보내면서 왜 연애도  하며 청춘을 허비하냐고. 요새는 너무  낳는다고 난리들이다. #라떼  나이  결혼해서  낳았다 하지만 지금은 딩크족이 흔하다. 혹은 아이 한 명 낳아 사랑 듬뿍 주며 정성껏 기른다. 쌍팔년도에 하면 신빙성 있는 육아 정보가 방대하다. 아직도 30 초반 이 젊게 사는 멋진 싱글  누나가 주위에 많다.


이게 우리 밀레니얼의 표준이다. #3#영끌#이번생은틀렸어#플렉스와 같은 라이프 키워드는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평균적인 삶을 특징한다.  노말 새로운 평균의 다른 말일뿐이다. 평균에 집착하는 , 사회가 정한 평균에 미달하는 ,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내리고 살아가고 있 것일까?


정량화되고 규격화되었습니까 휴먼?


우리 8살부터 19살까지 n학년 n n을 넘어서지  했다. 일반반, 우등반, 열등반으로 규격화된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대학 생활도 학년별로 정해진 준비 의무 정량화되었다. 입학과 졸업 순서대로 사회로 배출된 우리는 거의 비슷한 속도로 살아간다. 아이비리그 기준, SKY기준, 인서울 기준 그다음엔? 연봉 기준, 직급 기준, 아파트 브랜드 기준, 수입차 브랜드 기준, 이런 기준들  재미없다.


내가 대학 다닐 때 경영학 마케팅 수업에서 고객들을 세그먼트로 나누어 타겟팅하는 것을 배웠다. 대표적으로 쉬운 방법은 잠재 고객군을 인구통계학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미 통용된 옛날의 인구/성비 분포 기준으로 편리하게 나뉜 구분법이다. 이 나이 때 남성은 이러한 성향을, 이 나이군의 여성들은 이 정도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배운다. 참 쉽게 가르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러한 방식의 마케팅 기법이 더 이상 고객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인구통계학적 기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고객(유저)의 행동과 추구하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 고객 분석법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만큼, 과거의 규격과 정량법은 더 이상 지금의 기준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시대의 평균적 기술의 도입 수준을 따라간다. 칼라 티비가 보급되던 때엔  가족이 거실로 모였던 것처럼, 모뎀과 CD 게임이 판매될 때는 컴퓨터가 있는 친구네 집으로 모였다. 키오스크와 DID, 멀티플렉스가 도입되었을  영화와 쇼핑, 맛집을  큐에 해결하는 몰링(malling) 주요 여가 시간 소비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핸드폰이 손바닥 안의 고화질 티브이+게임기가 되면서 가족들은 굳이 거실에 모이지 않게 되었다. 클라우드와 OTT 일상화된 지금은 거실에 있는 셋톱 티브이가 영화관을 대체하고 있다. 기술 소량 품종 대량 생산에서 퍼스널 큐레이션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맞춤 서비스가 가능해졌다. 새로이 보편화된 기술들은 이렇게 삶의 모양을, 삶의 표준 모습을 바꾸고 있다.


평균, 안전한 듯 불안정한 그것


빠른 기술 발전으로 어제의 것도  것이 되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기준을 쫓아다닌다. 마치  막히는 경쟁 속에서 평균치에 안착하는  삶의 목표가  것처럼. 평균 인간이 현 시대에 가장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통계적인 자기만족에 취하면  삶의 풍부함을 2차원적인 현실에 스스로 가두는 꼴이 된다.  세상 많은 현상들이 정규 분포의 형태를 띠지만, 우리가  2차원적인 정규 분포표 평균값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평균은 변동적이다.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 그리고 구하는 시점에 따라 변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v.1 기준에서 v.2 기준으로 바뀐 평균일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거다. 따라서 평균을 잣대로  삶을 스스로 평가하기엔 매우 피곤한 작업 뿐만 아니라 의미 자체가 없는 일이다. 내가 속한 통계 집단에서 눈을 돌려  다양한 깊이를 넘나들며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정한 기준에 속박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웃라이어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도 우리와 다른 삶을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정한 x, y축에 나의 복과 가치를 평가받기를 거부하자.  노말(New Normal) 내가 정한다.


정함과 정해줌의 황금 비율


사회의 표준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궁극적인 의미 사회가 정한 가치 기준을 의식적으로 구별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 그중에는 나의 삶의 가치와 동일선상에 있는 도 있고, 반면에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반항하는 기준도 있다. 이렇게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기준들에서 내가 새로 정립할  있는 들을 찾는 과정이다. 인생이란 게임의 질서는 존중하되, 최종 승자의 규칙 내가 정하는 것이다. 회가 정한 룰과 내가 정한 승자의 규칙들 사이에서 통계적 평균값의 늪에 빠지지 않고 나만의 멋지고 주체적인 삶을   있는 황금 비율을 찾는 과정이다. 모두 각자의 황금률을 찾기 위한 고민에 빠지기 바란다.


essay by Junwoo Lee

photo by Charles Deluvio


작가의 이전글 가질까? 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