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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 n Wrestle May 01. 2021

나는 적극적으로 타협하겠다

바이크 운전에서 마가렛 대처, 그리고 삶의 균형까지

올해 3월부터 바이크를 타고 다니고 있다. 순수한 목적은 출퇴근할 때 소요되는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이기 위함이었고, 조금 불순한 목적은 내 캐릭터에 조금 더 거친 텍스쳐를 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내 삶의 루틴은 많이 변했고, 이제 좀 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목적지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모든 바이크 운전자들이 듣는 반응은 주로 두 가지, ‘위험하지 않아요?’와 ‘와 멋있네요’. 이 둘 중 하나만 듣거나 두 반응을 함께 받는다. 이렇게 멋있음과 위험은 항상 서로 옆에 바짝 붙어있다. 마치 피넛버터와 젤리 샌드위치처럼. 둘 중에 한쪽이 없으면 뭔가 심심하거나 애매하다. 우리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처럼(응?), 혹은 철창을 사이로 사나운 맹수들과 대면할 때처럼 위험한 것이 멋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걸 소유했을 때 느낄 불안정함에 대해 이유 없는 끌림을 느끼는 우리 인간의 특이한 심리적 화학 작용인 것 같다. ‘King of cool’ 스티브 맥퀸도 애연가이자 카레이서였다. 따라서 조금 더 ‘쿨’해지고 싶다면 안정감의 일부를 과감히 포기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은 포기, 양보 혹은 타협.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도로 위의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 스스로도 차도에 나서면 방어 운전을 하려고 노력한다. 신호 준수, 방향 지시등 키고 차선 변경, 빨간불에도 보행자 우선, 신호로 정차할 때 자동차 사이를 요리조리 추월해나가지 않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로 위의 나는 연약한 바이커다. 특히, 택시들에게는 온갖 감정들이 든다. 후.. 깜빡이도 켜지 않고 안전거리 무시하고 훅 들어오거나, 승객 승하차를 위해 급정거를 하던지, 참 여러 상황들을 목격한다. 사람인지라, 약이 올라 버린다.


그럼 나도 갑자기 속도를 올려 칼치기를 하고 싶어 지는 충동이 들기도 하지만, 도로 위의 나는 연약한 바이커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바이크를 몰고 나온 결정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프닝에 약이 올라버리면 내 안전 운전의 노력에 집중력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도로에서 아주 작고 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도로 위 안전을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 유령처럼 야밤에 미등도 안 키고 운전하는 이유가 있겠지, 비상등도 안 켜고 급정거하는 이유가 다 있겠지, 하며 모든 상황과 운전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도로 위의 무법자들에게 도로를 양보하는 것이다, 내 안전을 위해서.


스티브 맥퀸. 캬 멋짐이 폭발한다

타협이라는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오늘날은 대부분 타협은 최대한 안 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타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서로 양보해서 협의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타당한 수준에서 화합하는 것. 당사자는 나 자신과 나 자신, 혹은 상대방, 혹은 세상.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남긴 유명한 말 중 ‘진짜는 타협하지 않는다’가 있다. Life without compromise, 타협 없는 삶.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1979년부터 90년까지 영국 보수당의 수장을 맡은 그녀는 절망적이었던 당시의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다. 1979년은 이란의 이슬람혁명과 2차 오일쇼크로 인해 석유 가격이 급등했던 시기다. 그동안 경제적 황금기를 누렸던 많은 나라들에서 물가 상승과 함께 실업률까지 상승하는 스태크플레이션이 심각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 영국은 국민의 복지 수준을 올리기 위해 확대 재정 정책을 쓰고 있었다. 이 결과로 노조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세졌고 산업 전반적으로 노동 생산성이 크게 하락한 ‘영국병(The British Disease)’에 걸린다. 재정 적자가 커져가던 내부 상황에 중동에서는 석유 가격까지 치솟은 시대에서 핸들을 잡은 대처의 보수당은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처리즘’으로 불린 그녀의 강력한(그리고 무자비한) 경제 정책 패키지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식구들을 비슷한 수준으로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배고프다고 반항하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멱살 꽉 잡고 질질 끌고 가야 할 때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시대의 영국과 타협하다 보면 미래의 영국은 없을 것이다는 대처의 강력한 자기 주문이었다.


비슷한 시대 세계 반대편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이 ‘레이거노믹스’로 미국의 경제 회복을 이끌고 있었다. 같은 기조의 경제 정책이었지만 마가렛 대처에게 더 많은 비판의 화살이 돌아간 것은, 당시 타협에 대한 그녀의 가치 판단이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그녀의 무(zero) 타협 태도는 필요악(necessary evil)이었을까?


마가렛 대처는 극단적인 타협 없음을 보여준 사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타협 수준의 판단은 내 몫이라는 점이다. 기브 앤 테이크는 우주의 논리다. 하나를 양보하면 다른 하나를 얻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 작동 방식인데, 받기만 하거나 주기만 하면 불균형이 생기고 여기서 탈이 나는 것이다.


마가렛 대처


우리는 삶 안에서 어떤 판단을 통해 어떤 타협을 해가며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타협은 조화와 균형, 그리고 상생의 단어다. 우린 같은 시간 속에 숨 쉬고 있지만 서로 다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다. 주관적인 가치 기준이 개입하게 되면서 우리는 각자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쯤에서 우린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또 이쯤에서는 너에게 나와의 동행을 허락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이 수준의 타협을 결정했는가? 인생은 결정의 연속인 동시에 곧 타협의 연속이다.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다. 좋은 타협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더 중헌지 판단하고, 그게 내 가치에 맞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면 그렇게 가야 한다.


내가 오늘 바이크를 타고 군자에 가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잊지 않고 싶은 무언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거나 하는 분명한 가치(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운전함으로써 따르는 잠재적 도로 위 위험과 타협하지 않은 것이고. 도로 위에 오른 나는 내 최대의 안전을 위해 도로 위 무법자들을 먼저 가게 양보하는 내면의 타협을 이루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삶의 어느 부분에서 타협을 모색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디에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아야 할까. 모두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결국 더 나은 나라는 존재를 위함이다.


essay by junwoo

photo by JR Korp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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