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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 n Wrestle Aug 08. 2021

내가 미래를 보는 방법

내 삶을 독점하는 방법

다들 분주하다. 그 분주한 무리 틈에 섞인 나는 수많은 방향과 속도 사이에서 내 방향타만 놓치지 않게 질끈 잡고 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라지만 시간이라는 중력에 이끌리며 자연스레 표류하고 있다. 우리가 각 나이대를 시속(Km/H)에 빗대는 것처럼, 세월의 상대적인 속도감도 속도감이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지켜야 하는 최소 속도가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내는 속도인가, 끌려가는 속도일까? 어쩌면 속도라는 것도 생각한 만큼 우리가 스스로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 적어도 향하는 목적지는 알아야 한다.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을 읽고 있다.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는 주제를 여러 방식으로 접근하며 회사와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생존(더 나아가면 큰 성공) 전략을 설파한다. 6장은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대하고 준비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인데, 내가 작년 여름부터 끌고 가고 있는 고민의 맥락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쉬이 답할 수 없는 이 질문은 각자가 가진 미래의 통제 가능 여부에 따라 시작점이 고민의 시작이 달라진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듯, 지금의 나를 통해 미래를 유추해볼 수 있긴 하지만 그 미래를 현재의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봐야 할까? 이준우라는 삶의 실타래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고 있듯, 미래의 나와도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것이 오롯이 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미래라는 불확실함을 얼마나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는지에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과정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미래를 명확한 것으로 생각하면 미래를 미리 이해하고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반대로 미래란 불확실함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면 미래에 끼칠 영향을 만들어갈 노력도 미진할 것이다. 작가는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네 가지의 시각으로 나누었다. 피터 틸의 언어(번역)와 내 언어를 추가하여 정리했다.


명확한 낙관주의


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신이 미래를 계획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구 세계를 이끌어온 것은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다양한 분야에 포진해있던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은 이전 세대가 보지 못 한 미래를 만들었다. 20세기의 초반을 담당한 베이비부머의 부모님 세대는 생산성의 혁신을 통한 폭발적인 성장시대에서 빠르게 변하는 새로운 세상을 직접 경험하였다. 미래에 어떤 기술이 상용화되어 어떤 상품들이 대중의 일상에 스며들지에 대한 전략적인 계획이라기보단, ‘미래를 계획하면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한 사회의 주류 관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의 대담한 시도들과 그것을 진지하게 지지해줄 수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이었다. 그리고 후세가 그 혜택을 물려받았는데, 베이비부머 세대가 그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봐, 해봤어?”


불명확한 낙관주의


아마 베이비부머 세대가 ‘We over Me’ 시대 주의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애국이란 명분 하에 정부가 주도했던 새마을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 그리고 아나바다 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들이 지나치게 미담화되었다는 것을 차치하고, 전국민이 합심하여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전 새대와 미래에 대한 인식이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갓 가정을 꾸렸을 때 찾아온 IMF, 그리고 10년 뒤의 닷컴 버블을 겪고 무엇을 느꼈을까? 불명확한 낙관주의자는 미래가 지금보다 좋아지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더 좋아질지는 모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더 뼈 아픈 것은, 힘들이지 않고 얻은 물질적 풍요와 진보에 익숙한 상태로 자란 나머지 미래에도 그게 당연할 거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축만 잘해도 서울에 자가 한 채는 문제없이 가질 수 있는 세대는 더 나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대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부모님 세대부터 축적해놓은 자본은 새로운 소득을 낳았고 인플레이션과 함께 자산 가치도 상승했다. 가만히 있어도 나아지는 상황이라면 굳이 내 미래를 의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철밥통 회사에만 다니면 되는 베이비부머는 계속해서 이직을 시도하고 내 성장과 더 나은 기회를 찾아다니는 자녀들이 이해할 수 없다.


불명확한 비관주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것이 암울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를 타개할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군중 속에서 표류한다. 위기의식은 있지만 주도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임기응변을 통해 급한 불을 끄는 것에 익숙하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할 것이고 그 변화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는 빈 손으로 태어나 빈 손으로 죽겠지만 그 과정이 덜 고통스럽기를 바랄 뿐이다.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렸으니 즐겨야지. YOLO, 맞다, 우린 딱 한 번 산다. 그런데 한 번 산다고 충동적이어도 된다는 건 아닐 것이다. 기생충의 기택(송강호역)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계획은 무계획(NO PLAN)이라고 말하며 불명확한 비관주의자들을 대변하였다.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니까. 애초에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상관없는 거니까.


명확한 비관주의


내게 다가올 미래는 파스텔톤의 미래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구체적인 위기의식은 살아감에 있어 강한 동기(motif)가 된다. 항상 부족함과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딱 우리를 닮았다. 우선 이때까지 이 자격증도 따고 동시에 PLAN B도 준비한다. 근데 PLAN B만으로는 완벽히 준비했다 말할 수 없으니 저것도 해보려는 우리말이다. 위기의식이 너무 강해지면 그것은 공포가 되고, 공포는 우리의 오감을 마비시켜 방향감각과 위치감각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센서는 꺼두고 갖가지 위험 상황을 알릴 경보등만 잔뜩 켜 놓고 사는 것 같다. 이것은 저성장 시대에 태어나고 살아야 하는 우리 MZ세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금의 우리처럼 많은 학습과 준비됨을 요구하는 세대는 없었다. 경제, 금융 참여도와 관심도도 최고다. 빚내서 저축하는 우리. 우리의 포식자는 바로 우리 이전 세대들임을 깨달을 때의 박탈감. 힘닿는 데까지 비극적인 미래를 대비하려는 우리는 서로에게 눈물겹다.




이 세상의 내일은 위 네 가지의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만들고 있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태도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새로운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계획을 이행해 가면서 사유의 시선을 높게 가지고 있다. 명확한 비관주의자들은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또 새로운 것보다는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을 연마하며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 반면에 불명확한 비관주의자들은 대중의 역할을 하면서 이 시대상을 이해할 샘플이 되어주고 있다. 불명확한 낙관주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노오력이 부족한 사람들인가?


컨셉충, 내가 듣고 싶은 그 말


컨셉이란 내가 지향하는 목적을 드러내는 모든 방법을 총칭한다. 좋은 컨셉은 양방향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창작물을 통해 타인과 교감할  있는 쌍방향 통신이다. 내가 계획한 컨셉이 타인에게 제대로 인식되었을  느끼는 쾌감은 크다.


요새 유명한 맛집들은  가지로 승부한다. 에스프레소가 끝내주는 . 평양냉면만 3대째 하는 . 직접  팥만 쓰는 디저트 카페. 이미 대중들의 입맛과 취향 수준이 높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무언가를 경험하기 원하며 이에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이만큼 한곳에 집중해 특화된 자만이 오래가는 시대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퍼스널 브랜딩이  삶을 독점하는 방법이다. 그게 대중적이듯 니치(niche)하든 말이다. 독점적인 개인 경쟁력을 만들어내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것인가? 이것은 장기적이고 명확한 계획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미래는 우리가 언젠가 다다르고자 하는 미지의 지향점이 아니다. 내일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마주할 (self). 나는 어떤 독점적인 나만의 미래를 가질 것인가?


essay by junwoo

photo by Shubham Dh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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