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준의 모티브 69]
봄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비가 오니 온도가 뚝 떨어졌다. 처음 오게 된 이 호텔은 생긴지 얼마 안 된 비즈니스호텔이다. 몇 년째 교육을 진행해오던 회사에서 자신의 대리점들을 대상으로 협상 교육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평소에 많이 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동안의 관계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진행해왔던 교육의 연관성도 있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참가자들은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대리점에서 온 직원들이라 평소에 교육받을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교육에 대한 갈망도 있고, 오랜 시간 현업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교육생들이 열심히 참여하면 앞에서 진행하는 사람도 힘이 난다. 신나고 재미있게 오전 교육을 마쳤다.
점심은 호텔 2층에 있는 일식집에서 한다고 해서 이동했다. 30여 명 가까운 사람이 자리를 옮겼는데 문제는 식사가 준비된 곳이 야외 테라스 자리였다. 평소 같으면 따뜻한 봄바람에 바깥이 내다보이는 좋은 자리였을 텐데 갑자기 내리는 비로, 오들오들 떨면서 밥을 먹게 된 것이다. 특히 회덮밥을 시킨 나는 추운 곳에서 차가운 음식을 먹다가 감기가 걸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일단은 많은 사람이 식당에 들어왔고 다른 손님들도 있는 상황이라 세팅되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앞에 놓인 물을 마시는데 썰렁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자 내 앞에 있던 교육생이 묻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죠?” 빤하게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는 협상을 가르치고 있으니 잘 한번 해결해 보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럴 때 고려할 수 있는 유용한 레버리지는 크게 3가지다.
1. 대안 (BATNA)
협상에서 힘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나온다. 이 대안이라는 것은 생각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대안에 따라 느껴지는 힘이 다르기에 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창의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먼저 생각한 대안은 방으로 이동하는 것. 확인해 보니 방은 이미 다른 손님들이 예약을 한 상황이라 교육생 모두가 방으로 갈 수는 없다. 몇몇은 가능하다고 나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말은 하지만, 나머지 교육생들은 추운 데서 식사하라고 하고, 나와 몇몇만 따뜻한 방에 가서 식사를 하자고 하니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다음 대안은 테라스 바깥쪽에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두꺼운 비닐을 겉어올려 묶어놓았는데 그것을 내릴 수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전체 테라스 외부의 비닐을 내리려면 시간도 걸리고 비가 오는 상황이라 난간에 올라가서 내리다가 미끄러지면 위험하고,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할 직원이 없다고 한다.
2. 협상의 필요성
협상에 참여하는 상대방은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왜 꼭 우리와 자리를 마주해야 하는지, 우리와 협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협상이란 무게감과 중요도가 큰 쪽으로 결과가 흘러가는 시소게임이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진행하는 교육 담당자와 함께 있었기에 식당 매니저가 찾아왔다. 그도 예상 못 한 차가운 날씨에 당황한 듯하다. 하지만 손님이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정신이 없어 보인다. 교육 담당자는 원래는 호텔 밖 다른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호텔 매니저의 추천으로 이곳으로 옮겼는데 상황이 너무 안 좋다며 불만을 이야기한다.
식당 매니저는 미안해하면서도 날씨가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하니 담당자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럴 때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손님인지 어필할 필요가 있다. 이 회사는 일 년에 서너 번은 호텔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회사이다. 적어도 봄과 가을에는 대형 세미나를 진행한다. 올해 9월에도 이 호텔에서 교육을 할 예정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한번 오고 말 사람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음에는 올 사람이 더 많아진다는 것도 덧붙였다.
3. 협상의 타이밍
시간은 협상에 있어 영향을 미친다. 아무래도 선택에 있어서 조급한 쪽은 불리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시간적 여유나 우위를 점하는 것이 협상에 힘을 준다.
이 상황에서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다. 식당에 온 시간이 12시인데, 적어도 1시에는 밥을 먹고 쉬었다가 강의를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식사가 자리에 올려지기 시작했고, 돌솥에 나온 알밥을 먹는 사람이 나오는 순간 협상의 추는 기울고 말았다. 이제 좀 춥더라도 먹어야 한다.
여기서 하나 더.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고, 따뜻하게 먹을 수도 없다. 이렇게 조건이 안 맞는 상황에서는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얻으려 했던 니즈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공통 관심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얻으려 했던 것은 따뜻하고 맛있게 먹으려 했던 것 아니었던가. 식당 쪽에서도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많이 가져다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된장국도 아주 뜨겁게 해서 달라고 요청했다. 식당 매니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회덮밥을 다 비비고 먹으려 할 때 따뜻한 녹차가 하얀색 자기 주전자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며 올려졌다. 그리고 매니저는 된장국 대신에 생각지도 않았던 홍합이 푸짐하게 들어간 미역국을 준비해 주었다. 차가운 데서 식사를 하시게 되어 미안하다며, 자신들의 식당이 새로 시작했지만 잘하는 곳이라면서.
협상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일에서도 생활에서도. 조금 더 원리를 알고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앞에 앉아있던 교육생 덕분에 점심시간에도 뭔가 머리를 굴려야 했지만 나도 만족한다. 덕분에 오후 교육에 활용할 만한 이야깃거리와 이렇게 칼럼에 쓸 아이템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그 홍합 미역국도 아주 맛있었다.
[이형준의 모티브 69] 협상에 힘을 주는 3가지 레버리지
직장인의 성공을 위한 팟케스트 <3040 직딩톡>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