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아픔
오래전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종로에 위치한 약국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정도로 많은 약국들이 있다.
약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계절에 따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고 질환에 따라 자주 방문하기도 하고
영양제를 저렴하게 구매하려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왜 약국에서 일하고 싶어 졌을까?
그냥 궁금했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약국에서 일하고 싶어 졌다. 다행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비교적 쉽게 약국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다.
약국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약을 제조하거나 상담을 하지는 않는다. 약사님의 보조 역할을 한다. 주로 처방전
전산입력 업무와 수많은 약의 재고 파악 등 상품 진열이 주 업무다.
약국의 주인은 약사님인 줄 알았지만 주인이 따로 있었다. 이쪽 업계에서는 약국 주인을 국장이라고 한다.
국장은 꼭 약사 면허가 있어야 되는건 아니다. 돈만 많으면 된다. 결국 약사님도 국장님에게 고용된 직원인
거다.
약사님은 연세가 많으셨다 지금 기억에 약70세 이상 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약사님이 이야기하실 때는
상당히 나긋나긋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간혹 국장님의 쓴소리에 눈물을 훔치시기도 하고 정말 소녀
같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여쭤 보았다. 왜 아들 같은 국장에게 싫은 소리 들으며 힘들게 일하시는지 따져 물었다.
그러곤 약사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셨다. 집에 있기 심심해서 일게 되었다고 괜찮다고 이야기
하시며 눈물을 마저 닦으셨다.
알고 보니 약사님 남편은 서울대 출신의 의사고 지금은 은퇴하셨다고 하셨다. 대학 때 만나 연애 결혼 하셨다
고 이야기하셨다. 뭔가 모르게 오랜전 기억애 행복해 하신듯 했다. 예전에는 개인 약국도 하고 열심히
사셨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약국을 관리하기가 힘들어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야기를 더 이어나갈때즘 국장님이 문을 벌컥 여느 바람에 약국은 정적이 흘렸다.
약사님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해서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막상 약국에서 일하게 되니 약사님의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발행하는 처방전은 오직 약사님만 제조가 가능한 약이다. 약사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제조실에 출입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제조실에는 마약 성분의 약이 보관되어 있어 철저히 관리된다고 했다. 만약 마약성분의 약이 수량이 맞지 않으면 약사님이 감옥 가야 한다고 했다.
감옥 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소녀같은 약사님이 감옥이라도 갈까 봐 제조실 근처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약사님은 오랜 시간동안 약국에 있으셨는지 많은 약을 모두 알고 계신 듯했다.
궁금증이 많은 나는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약사님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약사님은 약이 아닌 따뜻한 한마디로 그 어떤 약보다 나의 궁금증을 진정시켰다. 정말 효과가 빨랐다.
가끔 약사님이 자리를 잠깐 비울 때 손님이 오면 얼마나 두렵던지 너무 무서웠다. 한번은 약국을 방문한 손님
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약사님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는데 효과 빠른 약 좀 주세요!"
나는 약사가 아니지만 이럴때를 대비한 예상질문을 해두었다.
다행히 약사님이 알려주신 예상 질문이라 진열되어 있는 약을 건네줬다. 주로 환절기에 감기 환자가 많아 판매되는 약은 정해져 있어 마치 약사님이 된 기분이다. 기분이 묘하게 붕 떳다.
그러나 약국을 방문한 손님 중에는 목적이 뚜렷한 손님도 꽤 있었다. 특정 약 성분이 포함된 약을 요구하거나
단종된 약을 요구하기도 했다. 약은 약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다들 자가진단이 가능한 손님이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험이 쌓이면 확신이 되는 것 같다.
공통적으로 판매되는 약들은 약국 관계자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하다. 원칙은 약사님이 판매하지만 그렇다고 불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약사님이 지시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아침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주로 숙취해소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얼굴엔 아직 술이 덜 깬 상태로 숙취해소제를 빨리 달라고 사정한다. 얼굴이 뻘건 손님이 한마디 건네면 술냄새가 약국 안에 퍼져나간다. 지난밤에 무척 신났나 보다.
숙취해소제를 찾는 사람은 전날 음주한 양에 따라 찾는 약도 다르다.
기본적으로 찾는 숙취해소제는 저렴하지만 보다 빠른 효과를 보고 싶은 사람은 조금 더 비싼 약을 원한다. 약효의 차이가 있는지 스스로 자가진단도 한다. 약사님이 뻘쭘해지는 순간이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주의 병원의 처방전을 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방문한다. 대부분 진통을 줄여주는 약이나 치료제가 많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금증이 생겼다.
특정 시간에만 몽롱한 상태로 약국을 방문하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왔다. 어디서 자다온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처방전을 건네는 손님은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오.. 오래 걸리나요?"
혹시 큰 병과 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뒤 젊은 남녀 커플이 오고 나서 조금은 눈치를 채고 약사님에게 물어봤다.
"저 손님은 어디가 많이 아픈 걸까요?"
약사님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셨다. 그리고 손님이 떠나고 나서야 이야기하셨다.
"여기 산부인과 병원에서 오는 손님 중에 몽롱한 사람은 대부분 중절 수술을 하고 오는 거야."
몽롱한 사람들이 건네준 공통된 약은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곤 그동안 창백한 얼굴로 방문한 손님들이 다시 떠올리고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갔다.
대부분 혼자 와서 마취가 덜 깬 상태로 비틀대면서 그렇게 큰일을 감당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잘 안 들린다고 크게 말하라고 했던 나에게 부끄러웠다.
말하지 못할 사정이란 게 이런 거였다.
상냥하게 말하는 걸 배운 적이 없어 어떻게 말하는지 몰라 고민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