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단말기가 찍히는 순간, 유통사는 돈을 번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2~3일 뒤에야 통장에 숫자가 찍힌다. 그 사이 유동성은 카드사와 VAN사, PG사의 손 안에 머문다. 매출의 2%에서 2.5%는 수수료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빠져나간다.
연간 거래액이 1조 원인 유통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매년 200억 원을 이 구조에 바치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는 카드를 긁는 순간 거래가 끝났다고 느끼지만, 유통사의 장부에서는 그 돈이 며칠 동안 공중에 떠 있는 상태다. 이 구조는 수십 년째 바뀌지 않았고, 대부분의 유통사는 이를 당연한 비용으로 받아들였다.
스테이블 코인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유통사가 직접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고, 고객이 충전해서 쓰는 구조로 전환하면 외부 결제망을 경유할 이유가 없어진다. 비자(Visa)도, 마스터카드도, 카카오페이도 중간에 낄 자리가 없다. 수수료는 사라지고, 정산 시차도 사라진다.
고객이 결제하는 순간 장부상 자산 이동이 즉시 완료되기 때문에 미수금 관리에 들어가던 행정 비용까지 없어진다. 단순히 수수료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결제 인프라 전체를 내재화하는 개념이다. 대형 유통사가 자체 물류망을 구축해 택배사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과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객이 코인을 충전해두고 당장 쓰지 않은 잔액, 즉 플로트(Float)가 발행사의 금고에 쌓인다. 편의점 선불카드나 스타벅스 앱 충전금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고객이 미리 넣어둔 돈은 쓰기 전까지 발행사 손에 있고, 발행사는 그 돈을 운용할 수 있다.
스테이블 코인도 동일한 구조다. 충전된 자금은 만기 93일 미만의 미국 단기 국채에 투자할 수 있고, 현재 연 4% 내외의 수익률을 가져다준다. 거래액 1조 원 규모의 유통사에서 미사용 잔액을 보수적으로 5%인 500억 원으로 잡으면, 준비금 운용만으로 연간 20억 원의 이자 수익이 발생한다. 고객이 충전 잔액을 쓰지 않고 묵혀둘수록 유통사의 금융 수익은 커지는 구조다.
숫자로 정리하면 그림이 선명해진다. 카드 결제 방식에서는 수수료로 200억 원이 빠져나가고 준비금 수익은 0원이다. 스테이블 코인 방식으로 전환하면 수수료 절감 200억 원과 운용 수익 20억 원이 더해진다. 같은 매출 규모에서 재무적 효과의 차이가 연간 420억 원에 달한다.
중요한 건 이게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가던 돈을 막은 것(200억 원)과 새로 들어오는 돈을 만든 것(20억 원)이 동시에 일어난다. 기업 재무에서 말하는 수익 구조의 전환, 즉 코스트 센터(Cost Center)가 프로핏 센터(Profit Center)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제 부서가 비용을 쓰는 부서에서 수익을 만드는 부서로 성격이 달라진다.
스테이블 코인이 만들어내는 재무적 레버리지는 마케팅 전략과 결합할 때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된다. 420억 원의 이득 중 일부를 고객에게 토큰 보상으로 돌려주는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 카드 결제 혜택을 줄이는 대신 스테이블 코인 결제 시 1%를 즉시 환급하거나 추가 적립을 제공하면, 고객은 실질적인 혜택을 느끼며 유통사 생태계 안에 머문다.
원래 카드사에 줄 돈으로 고객 충성도를 사면서 여전히 강력한 운용 수익을 확보하는 구조다. 항공사 마일리지나 백화점 포인트가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기존 로열티 프로그램은 마케팅 비용을 들여 충성도를 유지하는 구조지만, 스테이블 코인 기반 보상은 그 재원 자체가 금융 수익에서 나온다. 비용을 쓰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나누는 구조다.
여기에 행동경제학적 효과도 작동한다. 고객 입장에서 앱에 충전된 잔액은 이미 지출한 돈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소비 심리적 저항이 낮아진다. 충전 잔액이 남아 있으면 해당 플랫폼을 계속 이용할 유인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락인(Lock-in) 효과가 발생한다. 스타벅스가 전 세계 커피 구독자를 묶어두는 핵심 전략이 바로 이 선불 충전 모델이라는 점은 유통업계에서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물론 이 모델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온램프(On-ramp)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온램프란 고객이 자신의 은행 계좌에 있는 현금을 스테이블 코인으로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이 복잡하거나 낯설면, 아무리 정교한 수익 구조를 설계해도 채택률이 오르지 않는다.
2026년 현재 핵심은 은행 앱 내 원클릭 충전 형태의 기술 통합이다. 토스나 카카오뱅크처럼 금융과 소비를 하나의 앱 안에서 처리하는 슈퍼앱 구조가 온램프 장벽을 낮추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객이 충전 과정에서 '블록체인'이나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단어를 인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험이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 실무의 핵심이다.
규제 환경도 빠르게 정비되고 있다. 미국의 GENIUS Act, 유럽의 MiCA 규정은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가 갖춰야 할 준비금 요건과 감사 기준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유통사가 자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려면 이 규제 프레임 안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하거나, 이미 라이선스를 보유한 금융기관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규제 준수는 진입 장벽이기도 하지만, 일단 통과하면 경쟁자를 차단하는 해자(Moat)가 되기도 한다.
스테이블 코인을 결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절반짜리 이해다. 유통사 입장에서 스테이블 코인은 현금 흐름을 실시간으로 통제하는 관리 도구이자, 고객의 유휴 자금을 운용 자산으로 전환하는 금융 상품이다. 전통적인 유통업이 금융업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핵심 수익 모델을 유통업이 직접 가져오는 단계로 진입했다. "결제는 서비스이고, 수익은 금융에서 난다"는 플랫폼 전략의 완성형을 스테이블 코인이 현실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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