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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11.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3-

한 걸음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 -3-

수많은 번호판이 치솟아 올랐다. 몇몇 사람들은 내게 다가와서 뭔가 말하는 듯 했으나,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 그날?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육 천 만원!” 

직원의 큰 목소리가 경매장을 울렸다. 경매장이 술렁였다. 내 옆의 남자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와 나에게 쏠렸다.

“더 없으십니까?”

서율의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침묵에 잠겼다.

“187번 경매 물품. ‘부서진 심장’이 낙찰되었습니다.”     

서율이 ‘부서진 심장’이 담긴 상자를 들고 내게, 아니 내 옆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왔다.

나를 지나칠 때, 나에게 윙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남자와 서율은 진한 포옹을 나누었고, 사람들의 박수가 또 다시 쏟아졌다.

나는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뒤로하고 경매장을 나섰다.

경매장을 나선 나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혼란스러웠다. 서율은 내가 작품을 가져다 줄 것을 알고 있었을까?

“괜찮아요?”

서율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마주했다. 인위적이고, 위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율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 ‘부서진 심장’을 가져 왔느냐…. 이거죠?”

서율은 긴 생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아까 전에 내가 키스를 퍼붓던 새하얀 목덜미였다. 나는 서율의 질문에서 빠진 한 문장을 되뇌었다.

‘왜 그 물건을 경매에 올린거지?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이란 말이야.’

“그날 가져왔어요. 어차피 내 물건이니까.”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날 밤 가져갔구나. 그 간단명료한 사실에 내 마음에 아려왔다. 아까전만 해도 펄떡거리던 내 심장이 서율의 냉기에 싸늘하게 식는다. 

서율이 눈을 가늘게 떠서 나를 쳐다보았다. 유디트 I.

“준호 씨.”

서율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작은 사실조차도 화살이 되어 내게 날아왔다. 

“최근에 제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이름은 ‘콜로세움 오브 아티스트’ 요새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서바이벌 프로젝트죠.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예술품으로 전투를 벌이는 거죠. 준호 씨는 그 프로젝트의 첫 번째 타자로 뽑혔습니다. 당신의 상품은 이번 경매로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일 등의 상금은 삼 억. 게다가 우리 경매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되는 거죠. 보수도, 명예도, 아주 클 겁니다.” 

서율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나를 안아도 좋아요.”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놀라웠다. 나는 그녀의 핵에 닿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주 얕은 지표면일 뿐이었다. 이 여자는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 깊은 곳에는 어마어마한 냉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서율이 담배를 피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렇다. 대답해야 했다. 몸이 떨려왔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나는 정확하게 판단 할 수 없었다. 떨림이 멈추고 나서, 나는 서율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안하는 걸로 하지. 그리고 다신 연락하지 마.”

공방에 돌아온 나는 분노에 휩싸여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때려 부셔버리고, 짓밟았다.

화가 났다. 나의 감정과, 서율의 감정에. 

나는 서율을 사랑한다고 느꼈을까. 그 순간은 서율과 나는 단순한 육체의 결합이 아닌 정신의 결합이라고 믿었다. 사랑한다고 느꼈다. 착각이었어. 그녀에게는 단지 거래였을 뿐.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유리 조각이 깨져 내 심장에 날카롭게 박혔다.

며칠 후, 서율이 보낸 남자가 내 공방을 방문했다. 남자는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보수입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수표를 불태웠다. 그날, 나는 슬픔과 절망으로 만든 걸쇠로 공방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나는 방치된 오래된 고성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시간의 먼지가 천천히 내 감정들과 기억에 쌓여 갔다. 먼지가 쌓여 하나의 슬픈 덮개가 되는 동안 서율과 만났던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왔다.

정말 많은 눈이 온 겨울이었다. 내 공방이 위치한 곳은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눈을 보면서, 나는 서율이 마치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순수해보이지만, 실체는 전혀 순수하지 않았다. 일면 따뜻해 보였으나, 만져보면 차가웠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만지고 있자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의 개수만큼 서율을 떠올렸다. 많이 그리워했고, 또 많이 분노했으며, 서율을 용서하고, 내 자신을 용서했다.

가끔 내 감정을 통제 할 수 없을 때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삽을 들고 나가 허리께 까지 쌓인 눈들을 치우며 길을 만들었다.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에 공방을 차린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치우는 동안에는, 잠깐이나마 서율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을 치우다가 잠시 쉬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에서 시작된 생각이 어쩌면 

도대체 내게 왜!? 

라는 생각으로 끝이 날 때면, 눈이 가득한 삽을 던져버리고 눈 더미 사이로 뛰어 들었다.

으아아-. 어차피 아무도 듣고 싶지 않아 할 괴성이 부끄럽게 차가운 눈더미 안에서 울려 퍼졌다.       

여느 날처럼, 삽을 들고 공방을 나섰다. 채 해가 뜨지 않은 서늘한 아침 공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최근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서 쌓여있던 눈들의 높이가 다소 낮아져 있었다. 더 이상 눈이 오지 않으면 나는 뭘 해야 할까.

생각을 멈추고 들고 있던 삽을 쥔 손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근육이 뻐근해지는 느낌이 생각을 마음에서 몸으로 옮겨 주었다. 팔에 집중되었던 힘이 등과 허리, 엉덩이를 거쳐 허벅지, 종아리로 퍼져 나가면서 온 몸에 열기를 퍼트렸다. 솟아오르는 열기는 마음 한 구석에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는 서율의 냉기를 이겨내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삽을 쥐고, 주위에 쌓여 있는 눈 더미를 파서, 집 뒤에 있는 공터에 몰아넣는다. 단순하고 심플한 작업이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몸을 움직이는 것 이상은 필요 없다. 점점 작업에 몰입 할수록, 머릿속에 남아 있던 생각의 찌꺼기들이 방울방울 솟아오르는 땀으로 깨끗이 씻겨나갔다. 한참을 작업을 하던 나는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갈색 잔디 사이에서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새싹이었다. 앙증맞고 귀여운 새싹. 양 갈래로 갈라진 그 생명력이 가득한 초록색. 어떠한 생명의 징후라도 보이지 않는 이 겨울의 땅에 피어난 하나의 불가사의한…. 새싹.

나는 그제야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음을 알았다. 언젠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다. 봄도 언젠가는 끝나고, 여름이 온다. 여름이 끝나면 가을도 오겠지. 가을이 지나면 다시 겨울이 온다. 당연하게 느껴지던 사계절의 순환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의 태엽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삽을 씻어 창고에 넣고 짐을 챙겼다. 다시 한 번 삶을 살아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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