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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16.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6-

열기의 도시 -2-

시 한국어에 당황한 나는 곧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네. 한국인입니다.”

“와. 정말 당신처럼 한국인 티 나는 한국인은 처음 봐요.”

나는 서둘러 내 차림을 둘러보며 한글이 새겨져 있는지를 확인했고, 그녀는 내 그런 모습이 웃겼는지 풋. 하고 웃었다.

우리 테이블로 향하는 시선들을 간단하게 무시한 그녀는 자신의 몫으로 하이네켄과 연어 샐러드를 주문했고, 나는 필스너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잠시 후에 주문한 음식들과 맥주들이 테이블위에 놓여졌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세리에요. 물론 저도 한국인이에요.”

나는 조그맣게 입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울림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리.

“자. 한잔.”

세리가 맥주잔을 들었다. 나는 세리와 건배하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입에 묻은 거품을 혀로 살짝 닦아낸 세리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 이름도 가르쳐 줬으니…. 당신 이름도 가르쳐주셔야죠?”

아차.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준호.”

세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어 샐러드로 포크를 뻗었다. 연어를 둥그렇게 말아 야채들과 함께 포크로 찍어서 입으로 가져간 세리가 우물거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 혹시나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원래 낯선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뭐랄까. 음…. 나는 헤픈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서요.”

“그럴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남은 닭 날개를 집어 올렸다. 글쎄. 세리의 말이 아마 틀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아직 그녀를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자. 준호 씨. 다음 질문.”

필스너의 호박색 액체 너머로 나를 향해 뻗어있는 그녀의 검지가 보인다.

“무슨 일로 남자 혼자 싱가포르에 온 거죠?”

“….”

왜 이 여자는 내게 이런 걸 묻는 걸까. 나의 이야기를 해도 될까. 믿어도 될 사람인가. 여기는 싱가포르 인데. 비행기로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이 먼 타지에서. 뜨거운 열기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곳에서. 그리고 수많은 취객들과 음험한 욕망들이 들끓는 이곳에서.

고민 하는 사이에 세리의 손가락이 다시 테이블 너머로 돌아갔다.   

“뭐. 괜찮아요.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세리. 우리의 거리는 잠시 가까워졌지만, 곧 멀어졌다.

세리의 침울해진 모습에서 그녀가 위험한 여자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단지 내게 먼저 다가선 것 뿐 이었고, 지나치게 겁을 먹었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믿어보자. 뭐. 어차피 알고 지내는 사이도 아닌데. 내 인생에 어떤 영향도 없을 여자인데. 조금만 털어놓기로 하자.

마음을 먹었는데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잠깐만요.”

나는 세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세리가 고개를 들자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아. 맥주가 한 잔 정도 더 있으면 용기가 날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러서 조금 남아있던 필스너를 마저 마시고 종업원에게 추가로 필스너 한 잔을 주문했다.

“헤어졌어요.”

세리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길게 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믿었던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구이기도 했는데…. 갑자기 내 뒤통수를 딱! 때려버린 거 있죠? 참나.”

“저도요.”

바보같이도 이제야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한 이유는 나와 같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동지를 만난 것 같아 매우 기뻤기도 했고,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이야기를 간략하게 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한 적이 있었고, 여자 친구는 그것을 그냥 돈을 주고 팔아버렸다는 정도로.

“하. 거 참 나쁜 년이네.”

어느새 얼굴이 빨개진 세리가 말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흠칫했는데, 사실 나는 서율과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쁜 년’이라고 직접적으로 원망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나쁜 년이었죠. 아. 그리고 세리씨의 그 남자도 나쁜 놈이에요. 정말.”

“뒤통수라니. 정말 비열한 놈이었죠.”

우리는 한참 년(?)과 놈(?)을 신나게 씹었다. 믿었던 사람에 대하여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대로 상대를 상처 입혀버린 그들. 그리고 그들을 믿었던 자신에 대한 한탄 등이 오고 갔다.

한참 목청이 높아진 도중에야 문득 목이 말라 맥주잔을 잡았을 때, 술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세리의 잔을 보니 마침 세리의 잔도 비어 있었다. 술이 다 마시고 싶었고, 세리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맥주를 조금 더 마실까 하는데. 세리 씨는요?”

“음. 두 병 정도 더 시킬까요?”

“그럴게요.”

주문이 끝나자 세리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리는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추가로 주문한 맥주들이 차가운 얼음이 가득한 통에 담겨 테이블로 도착했는데도, 아직 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저 술값을 내지 않으려는 얄팍한 수작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그녀를 믿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를 먼저 믿지 못한 나의 마음이 아닐까. 그녀에게 이곳에서 먼저 남자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녀가 나를 믿은 만큼 내가 그녀를 믿지 못한 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한동안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종업원이 테이블로 다가와, 가게의 마감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층 한산해진 홀을 둘러보고는, 계산을 마치고 가게 문을 나섰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땀으로 가득 찬 이 불쾌한 기분을 어서 씻어버리고 싶었다. 아마 오늘 밤에는 잠을 쉽게 못 잘 것 같았고, 담배를 한 가치 꺼내었을 때 저 쪽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

세리였다. 세리가 비척이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반쯤 풀린 동공이 이리저리 정처 없이 해매다 나를 향했다.

“어. 준호다.”

비실비실 웃음을 짓는 얼굴이 한눈에 봐도 많이 취한 상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여러 음식물의 큼큼한 냄새가 나는 것이, 세리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다시 담배 갑에 집어넣고 세리에게 말을 걸었다.

“세리 씨. 괜찮아요?”
 “그러엄~. 괜찮아!”

갑자기 차렷 자세를 취한 세리가 새된 목소리를 꽥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곤란한데. 일단은 세리를 숙소로 데려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리에게 묵고 있는 곳을 물었다.

“그래요. 세리 씨. 묵는 곳이 어딥니까?”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의 주소를 중얼대던 세리가 갑작스럽게 주저앉았다.

“저…. 저기. 세리 씨?”

당황한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 세리를 몇 번 정도 흔들어 보았으나 벌써 굳게 닫힌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어쩔 수가 없구나. 나는 세리를 조심스럽게 들쳐 업고 래플즈 호텔로 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켰다. 나도, 세리도 땀을 많이 흘렸다. 비록 세리가 자그마한 체구를 지녔다고는 하나, 필스너는 꽤나 독한 맥주였고 독한 맥주에 취해 축 늘어진 성인 여자 한 명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세리를 업고 발걸음을 땔 때 마다 등으로 느껴지는 풍만하고 탄력이 넘치는 가슴이 자꾸만 내 욕망 언저리를 쿡쿡 찔러대는 통에 더욱 더 힘들었다.   

땀에 젖은 세리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 열기로 달궈진 피부에 쏟아지자 조금씩 열기가 식어가며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차가운 물로 열기로 달궈졌던 피부와 그 아래 내재되어 있는 욕망까지 마저 식힌 후에, 커다란 타월로 구석구석 몸을 닦고 문을 열었다.

침대위에 누운 세리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잠든 모습이 보였다. 땀에 젖은 생머리가 세리의 얼굴을 제멋대로 덮고 있었으나, 그 모습이 더욱 매혹적이었다.

시선을 조금 더 옆으로 옮기자 땀에 젖은 흰 티셔츠 안으로 비춰지는 세리의 검정색의 속옷이 보였다. 나는 한동안 시선을 옮기지 못하고 속옷 사이의 그 매혹적인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졌고, 상상이 점점 진도가 나감에 따라 내 하체가 반응했다. 힘이 쏠리는 느낌과 함께 바지의 중앙 부분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한 욕망이 명령했다. 어서. 어서.

아니다. ‘아직’ 아니다. 분명 언젠가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는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는 옷장을 열어 한국에서 가져온 입기 편한 민무늬 티셔츠 한 장을 미리 꺼낸 다음 세리의 티셔츠를 천천히 벗겼다.

티셔츠의 목 부분이 넉넉하게 파여진 덕분에 의외로 세리의 티셔츠를 벗겨내는 것은 매우 쉬웠다. 벗겨낸 티셔츠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걸어놓고, 욕실에 비치되어 있는 수건을 따듯한 물에 적셔서 가져와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세리의 몸에 방울져있는 땀들을 닦아냈다.

수건으로 땀들을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살펴본 세리의 몸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글쎄. 저 먼 옛날에 자신의 살아있는 이상형을 보지 못한 조각가가 만들었다는 여인상의 모습이 이런 모습일까. 노란색의 고풍스러운 실내등 빛이 자그맣고 둥그런 타원형의 머리를 지나 가느다란 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떨어지는 가느다란 곡선, 반원 모양의 어깨부터 시작되어 둥그렇고 너무나 탐스러워 보이는 가슴의 풍만한 곡선, 그리고 다시 허리까지 잘록하게 들어가기 시작해서 다시금 풍만해지는 골반까지의 곡선, 신체의 끝을 향해 다시금 유려하게 펼쳐지는 허벅지와 종아리의 곡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싶은,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져줄 그 곡선의 향연.

세리의 곡선들은 서율의 선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서율의 몸의 선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곧 터질것만 같은 폭탄같은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과도한 곡선이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평지 같은 밋밋함이.

직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날카로운 직선에 베어버릴 것 같은 위험이 느껴지는….

어느 순간 흠칫-. 하고 놀라게 되는 그런 선들의 모임….

반면 세리의 곡선들은 마치 환상의 유토피아 한 가운데에 위치한 동산만이 가질 수 있는 안정감을 지닌 것 같았다. 끝없이 흘러가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비늘이 가득한 강물의 유려한 곡선들.   

세리의 몸을 보면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은 없다. 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옛날의 조각가가 세리를 보았더라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세리의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 에어컨이 작동하는 것도 깜빡 잊고 있었구나.

나는 땀에 젖은 세리의 티셔츠를 접어서 테이블 위에 잘 올려놓고, 옷장을 열어 한국에서 가져온 여분의 티셔츠를 꺼내 세리에게 천천히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고된 작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잠시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차마 핫팬츠는 건드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느새 이불을 상체에 돌돌 말고 눈을 감고 있는 세리가 마치 포대기에 싸인 아기 같아 보였다. 나는 잠시 세리에게 손을 뻗었다가, 곧 거두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싱가포르의 열기는 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방심하는 사이에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따르게 된다. 조심해야 한다.  

“우응….”

세리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테이블의 다리에 등을 기댄 채로 세리의 잠꼬대를 바라보았다. 세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지 눈을 감은 상태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세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세리의 발끝까지 덮어주고 방을 나서서 정원으로 향했다.

바람이 시원했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밤중의 어두운 나무들 사이에 숨어 밀담을 나누고 있는 연인 한 쌍이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나는 연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비어있는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세리가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녀가 부르는 음표들이 하늘로 올라가 춤을 추었다. 너울거리는 그 장면이 너무도 아름다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아까 마신 술기운이 올라오며 수면을 재촉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옆으로 누워 세리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잠이 들었다.      

노래가 들렸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노래. 과하지 않고, 따뜻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엉킨 마음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다.

간만에 술을 마신 덕분인지 눈꺼풀이 한층 무거웠다. 노래 소리는 베란다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나는 묵직한 눈꺼풀을 힘껏 밀어낸 후에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밤에 내가 입힌 티셔츠와 핫팬츠를 입은 세리가 난간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정답게 노니는데

외로움 쌓인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갈까나      


어디선가 들어본 가사였다. 어디서 들어본 가사더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나의 인기척을 느낀 세리가 나를 향해 뒤돌아봤다.

“어. 깼어요?”

“네. 좋은 노래네요.”

“저길 봐요.”

세리가 손가락으로 일 층에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그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에는 이름 모를 새 두 마리가 나무 근처를 날아다니며 서로를 향해 지저귀고 있었다.

“저 새들을 보니 이 노래가 한번 떠올라서 불러봤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리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웃었다. 우리는 잠시 일 층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세리가 티셔츠를 손으로 잡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떠보려는 의도가 가득한 표정이다.

“어제 준호 씨가 해준 건가요?”

나는 시선을 회피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 음. 네.”

세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떡해. 나 다른 남자랑 하룻밤을 보내다니…. 나 책임져요.”

“어….”

입이 축 처진 세리가 가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책임져’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그 얼굴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세리는 표정을 절대로 숨기는 일이 없었다. 숨기려고 하는 것인데 숨기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세리를 보고 있자면, 나도 세리에게 숨기지 않고 싶었다. 세리와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싶었고, 그녀와 그 순수함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 양 팔을 활짝 펼치고 내 가슴을 드러내어 내 마음과 그녀의 마음을 맞닿게 하고 싶었다.

“어제 세리 씨에게 옷을 갈아 입혀 준 건 사실이지만 음…. 어. 세리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하지만 세리 씨가 책임지라고 하면. 책임질게요.”

“내가 생각한 일이 뭔데요?”
 예싱치 못한 질문에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으….”

내가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허둥대고 있을 때, 세리가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준호 씨가 내가 ‘생각한 것’을 안한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럴 사람이 아닐 것 같았거든요.”

잠시의 어색한 침묵 후에 세리가 팔짱을 끼고 난간에 기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싱가포르로 온지는 얼마나 됐어요?”
 나는 손가락을 펼쳐 천천히 이곳에서 지난날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이제 사 일 됐네요.”

“풋.”

세리가 손을 올려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법 얄미운 모습이다.

“내가 한창 선배네. 자. 이렇게 해요. 어제 내가 신세를 좀 졌으니, 오늘은 내가 준호 씨 관광을 도와주는 걸로.”

잠시 내 머릿속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쳐갔지만, 곧 따뜻한 봄의 온기에 사라졌다. 어느새 세리가 내 손을 살며시 잡고 있었다.

“좋아요.”

나의 대답을 들은 세리가 방긋 웃으며 나를 이끌고 방문을 힘차게 열었다.

문틈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따뜻한 바람이 나의 얼어붙었던 마음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세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의 지하철역이었다. 여긴 며칠 전에 저녁을 먹었던 곳인데. 잠시 그 때의 기분을 회상해 보고 있다가, 문득 세리가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어때요. 처음 보는 곳이죠?”

나는 최대한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을 관찰하던 세리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요. 한국에 있는 차이나타운 같은 곳이에요. 이곳 싱가포르는 여러 인종이 모여 살고 있어요. 중국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은 이곳 차이나타운이에요. 중국인들은 신기해요. 세계 어디나 있잖아요. 잘 살구. 돈도 잘 벌구. 히히.”

세리의 설명을 들으며 계단을 올라 출구를 빠져나와 거리로 나오자 눈에 익숙한 울긋불긋하게 화려한 거리가 나타났다. 낮의 차이나타운도 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눈빛을 선글라스에 가린 채 고개를 돌려가며 좁은 길거리에 양 옆으로 늘어선 상점들을 구경하는 관광객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갖가지 흥미로운 음식들을 늘어놓고 숙련된 호객 행위를 펼치는 중국인과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처음 여기 싱가포르를 왔을 때, 나는 이곳에서 묵었어요. 차이나타운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들은 깨끗하고 저렴하거든요. 음식도 저렴하고 맛있고. 깔끔하고. 중국인들이 좀 무뚝뚝하긴 한데 장사에 대한 원칙은 칼 같이 지켜요. 그게 마음에 들어요.”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 우리는 ‘야쿤 카야 토스트’라고 적혀있는 간판 앞에 멈췄다. 투명한 유리창 안에 비춰지는 가게 안에는 이른 시각인 데도 제법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장 차림인 것으로 보아 직장인들 인 것 같았지만, 가게를 들어서자 우리 같이 편하게 차려입은 관광객들도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싱가포르에 오면 꼭 먹어 봐야하는 음식들이 있어요. 칠리 크랩. 페퍼 크랩. 바쿠테. 야쿤 카야 토스트. 치킨라이스 등…. 맛있는 음식이 너무나 많지만은 일단 지금은 아침이니까. 토스트가 좋겠죠?”

자리에 앉은 세리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익숙한 몸짓으로 주문을 마쳤고, 잠시 후에 나와 세리 앞에는 각자 먹기 편하게끔 사등분이 된 노릇노릇하게 익은 갈색의 토스트와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색의 커피, 그리고 반 쯤 익은 수란 두 개가 담긴 접시가 놓였다.

세리는 나에게 수란을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테이블에 놓인 자그마한 통에 담긴 검정색의 소스는 간장 소스이며 그것을 수란이 담긴 접시에 조금 부어 먹으면 된다는 세리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나는 간장소스를 조심스럽게 수란에 뿌렸다. 검정색의 간장방울들이 수란 위를 떠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수란은 예상보다 훨씬 미끄러웠다. 욕심 가득하게 퍼낸 노른자가 털퍽-.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떨어졌고, 나는 급하게 티슈를 뽑아 노른자를 닦아내려고 애를 썼으나, 노른자는 티슈에 흡수되지 않고 자꾸만 이리저리 테이블을 굴러다녔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세리가

“히히. 귀엽다.”

라고 한 마디 내뱉은 순간

기쁨의 환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놀랍도록 순수한 미소다.

웃을 때의 그녀는 완전한 ‘기쁨’에 차있었다. 그 표정에는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오직 ‘기쁨’만이 존재한다.  

그 순수함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하고, 상처를 따듯하게 어루만진다.

문득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겨울 이후로 처음으로 짓는 웃음이었다.

그녀와 함께 웃고 있노라면, 어둡고 긴 과거의 터널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아주 자그맣지만 너무나도 따뜻한 희망이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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