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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19.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7-

열기의 도시 -3-

토스트를 다 먹고 나서 멀라이언을 보고 싶다는 내 의견에 따라 우리는 멀라이언 타워를 보러 가기로 했다. 멀라이언 타워는 센토사 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차이나타운’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도중, 세리는 갑자기 생각 난 듯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멀라이언은 왜 보고 싶은 건데요?” 

“꿈에 나왔어요.”

“꿈에?”

“그래요. 꿈에 멀라이언이 나왔거든요.” 

세리가 푸하하- 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렸다. 

“준호 씨는 참 귀엽네요. 아기 같아요.”

‘당신도 그래요.’

떠오른 문장이 부끄러움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는 가라앉은 문장을 다시 끌어올리는 대신 세리를 보며 부끄럽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준호 씨는 몇 살이에요?”

“몇 살?”

“네. 흐음…. 나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 같은데.”

“세리 씨는요?”

“제가 먼저 물어 봤잖아욧!”

입술을 앙 다문 세리가 장난스럽게 작은 주먹으로 내 팔을 툭 친다. 팔로 느껴지는 힘이 제법 강하다. 나는 팔을 슥 문지르며 씩 웃었다.

“스물넷이요.”
 “헐.”

턱이 떡 벌어진 세리. 다소 과장된 리액션 마저도 귀엽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쑥 뻗어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몇 살 같아요?”

나의 손바닥 아래서 초롱초롱 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세리. 뭔가 위험한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스물 둘?”

“…!”

세리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다랗게 변한다. 

“스물이거든요!”
 매서운 뒤끝이 이어졌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냐. 도대체가 여자를 대하는 매너가 없다. 아니 적어도 눈치가 있다면 최소한 스무 살이라고 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냐는 둥.

다행히도 지하철이 도착했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틈을 타 나는 화해를 시도했다.

“미안해요. 내 말은….”

“흥. 됐거든요. 미안하다고 해봤자 이미 늦었어요. 여자의 마음은 쉽게 상처 받는다구요.”

시무룩하게 눈을 깔고 있는 세리를 보자니 마음이 아파왔다. 나는 세리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폈고, 세리의 나이에 대한 나의 조심스럽지 못한 발언(세리의 표현을 빌자면)은 생각보다 세리에게 많은 상심을 가져다주었던 것 같았다. 나로 인해 세리가 아파하다니…. 기껏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세리가 반걸음 물러선 기분이 들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내가 바보 같았다. 어색한 침묵 안에서 우리는 센토사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차이나타운 역에서 시작된 침묵은 멀라이언 타워 앞에 노점상에서 과일 주스를 구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

노점상 앞에 선 나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말은 날카로운 연장과 같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옳은 목적에 쓰이게 되면 좋은 것이지만, 나쁜 용도로 사용되었을 때는, 아니 자신의 용도가 그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쉽게 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은 나무나 암석, 보석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연한 것이어서 쉽게 상처받는 것이다.

“수박 주스요.”

세리가 먼저 말을 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세리의 얼굴을 살폈다. 세리는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수박 주스를 좋아해요.”

“수박 주스 두 개요.”

나는 점원에게서 거의 낚아채듯이 수박 주스를 받아 들고는 세리에게 건네다 주었다. 세리는 반쯤 고개를 숙이고 수박 주스를 받았다.

세리와 나는 수박 주스를 마시며 멀라이언 타워의 머리 부분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매우 좁았고, 또 이상하게도 우리 단 둘만 있어서 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세리의 얼굴은 아직도 씰룩 이고 있었고, 매우 불편해 보였다. 말은 날카로운 것…. 위험해…. 세리는 소중해…. 계속해서 몇 가지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동안에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세리가 더 빨랐다. 어느새 내가 세리의 뒤를 쫓아가는 형국이 되었고 세리는 전망대의 난간에 서서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간 근처에 서 있는 그녀의 생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려고 노력했지만, 세리의 시선은 저 먼 곳의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미 한 번 찾아온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같이 온 것만으로도 내게는 전혀 다론 장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생겨난 구멍을 메우는 것을 넘어서 더 넓고 더 깊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나를 버린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저 수평선 너머로 향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있고, 서로의 과거를 토해 내고, 그 과거에서 생겨난 서로의 상처를 껴안고 저 미지의 세계에서 같이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세리의 과거를 알고 싶어 졌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결정들의 모습과 색깔, 그리고 그 결정들을 이루는 결들과, 그리고 그 결들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

한 걸음을 내딛자.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난간에서 사진 촬영을 마친 우리는 타워 내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와 타워 밖으로 나왔다. 세리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니 여전히 깊은 슬픔의 강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에 빠진 내 눈에 저 멀리 관광 안내 부스가 보였다. 부스 위에는 ‘조각 체험!’이라는 관광 문구와 함께 화살표 방향이 쓰여 있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마침 잘됐다.

“세리 씨. 이쪽이에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의 세리를 데리고 관광 부스 옆으로 향했다. 관광 부스 옆에는 사람들이 조각 체험을 할 수 있게끔 각종 도구들과 나무토막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가끔 시선을 던졌지만, 정작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는 안내 요원에게 체험 요금을 내고, 조각칼을 잡았다. 세리를 위한 조각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었다. 나는 조각칼의 날과 나무토막을 살펴보았다. 터무니없이 무딘 칼날과, 싸구려 품질의 나무였다. 과연 이 재료들로 해낼 수 있을까…. 

“준호 씨. 해보려고요?”

세리의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무토막을 들고 다시 결을 살펴보았다. 

“네. 세리 씨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요.”

“어. 준호 씨 조각 잘하나 보다.”

세리가 싱긋 웃었다.

“음. 막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세리 씨를 위해서 해보고는 싶어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고는 용기를 내어 조각칼과 나무토막을 손에 쥐었다.

조각칼을 잡자마자 도구들이 마치 저 멀리 우주에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이미지를 형상화해보려 노력했지만 나의 상상력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있었고, 손의 신경은 오랜만의 작업으로 인한 긴장으로 과도하게 팽팽해져 당겨졌으며 무뎌진 눈은 나무토막의 결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용기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꺼져가는 용기에 다시 한번 불을 붙일 수 있어야 하는데…. 음….

나는 눈을 뜨고 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손 좀 주시겠어요?”

귀여운 세리의 손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잠시 조각칼을 내려놓고 세리의 손을 잡았다. 형용할 수 없는 온기를 담은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세리의 손에서 옮겨온 다정함이 내 심장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그 다정함이, 내 마음 구석에 남아있던 냉기를 말끔히 몰아내었다. 좋아. 할 수 있어.

잠시 눈을 감고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흐릿한 선들과 밝고 어두운 명암들이 머릿속의 세계를 날아다니며 점차 형상을 갖추었다. 좋아. 형상이 완성되었어.

나는 세리의 손을 놓아주고, 다시 조각칼을 들고 조각을 시작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몇몇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곧 내 곁을 떠났고, 내 곁을 지키는 것은 오직 세리뿐이었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나무토막이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잠시 옆으로 돌린 시선에 세리의 빛나는 눈동자가 들어왔다.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 나는 지친 손에 다시 힘을 불어넣고 작업을 재개했다. 조금 더…. 조금 더….

행사 진행 요원이 슬슬 행사장을 정리할 때 즈음에, 조각이 완성되었다. 음표를 머리 위에 달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그맣고 귀여운 멀라이언 나무 조각상. 나는 완성된 조각을 종이 사포로 살짝 문질러 표면을 매끄럽게 닦아 내고는, 마지막으로 입김을 후-. 불었다. 조각을 들고 일어서 뒤를 돌아보자 제일 먼저 동그란 눈을 하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조각을 조심스럽게 세리에게 내밀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멀라이언의 얼굴이 조명을 받아 말갛게 빛났다.

“자. 완성됐어요. 세리 씨. 아까, 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세리 씨에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내 사과의 의미로 이 조각상을 받아줄래요?”

세리의 눈망울이 커졌다. 

“그 사소한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네.”

“…. 바보.”

나는 드디어 차갑고 어두운 고성의 문을 열고 나와 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리에게서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이 내 몸을 녹였다.  

“좋아해요. 세리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조각을 받아 든 세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안겨왔다.      

센토사 섬의 고백 이후, 우리는 서로의 삶에 조금씩 다가갔다. ‘사랑해.’ 라던지, ‘사귀자’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 둘은 서로에게 연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센토사 섬에서 돌아오기로 한 날, 서로에게 말을 편하게 함으로써 가까운 사이가 됐음을 받아들였다. 세리는 클락 키 강변 부근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장기 투숙을 하며 나와 만났던 가게에서 서빙을 하다가 공연 시간이 되면 공연을 하고 있었고, 나는 매일 아침 세리를 만나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클락 키로 향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 되었고, 세리는 늘 게스트 하우스의 입구에서 그런 나를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정은 보통 게스트 하우스 앞에 있는 카페에 앉아 차가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일정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으로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일정에 대한 의견 교환 방식은 내가 가이드북을 펼쳐서 유명한 관광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그곳에 대해 소식을 듣거나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세리가 부연 설명을 붙이는 쪽이었다.

“세리가 가 본 곳은 안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세리가 머리를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상관없어. 갔던 곳이라도 준호와 가는 곳이라면 다른 곳이 될 것 같아. 준호와의 기억이 그 위에 덧칠되면 더 아름다운 기억이 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나의 싱가포르는 ‘세리’라는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지고 있었고, 세리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끝나면 바로 움직였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하루의 여행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세리와 함께였다. 세리가 차를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때로는 MRT를 타고, 때로는 걸으며. 싱가포르의 방방곡곡을 누볐다.

세리와 하루를 보내며 처음으로 세리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세리는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강렬한 햇빛이 대지를 불같이 달구는 시간에도, 익어버린 대지가 다시금 천천히 식어가는 시간에도, 세리는 늘 걷는 것을 선호했다.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세리는 단순히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떤 뭐랄까… 일종의 습관. 아니, 일종의 어떤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았다. 같이 여행하기 시작한 첫날 무려 세 시간 동안 한낮에 멈추지 않고 걷는 세리를 보며 던진

“세리는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하나 봐.”

나의 질문에

“나는 걷는 것이 좋아.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직접 세상을 경험하고 세세한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정말 좋아. 걷고 나면 몸도 개운해져서 좋고. 가끔 골목에서 마음에 드는 자그마한 가게를 발견하는 것도 좋고. 그리고 걷는 것은 슬픈 생각들을 멈추게 해주니까.”

라고 대답하던 세리.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여행을 하고, 해가 지고 저녁이 다가오면 세리는 하루 종일 걸었음에도 지치지도 않고 일을 나갈 준비를 했다.

세리와 사귄 첫날에 정해진 법칙이 있었다. 세리는 나를 만났던 가게에서 서빙 일을 하면서 , 매주 금요일 밤에 노래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곳에 찾아오지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음…. 웬만하면 준호는 내가 일하는 가게에 안 왔으면 해.”

“…?”

“음….”

직접 세리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세리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세리가 망설이는 부분이 어느 부분일까. 아마 그 날의 세리의 인기를 봤을 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마 가게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직 나에게 그만큼의 신뢰가 없는 것일까. 좀 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일까…. 혹은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인가.

아마 전자일 것이지만…. 나는 세리를 좀 더 믿기로 하였다. 어차피 나는 사랑에 빠졌고 괜히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면서 상처받기는 싫었다.

세리의 의견을 존중해주자. 나는 아직도 말을 망설이는 세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세리의 의견이 그렇다면 존중해줄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세리가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지만…. 나는 세리처럼 쾌활하게 웃을 수 없었다.

세리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녀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세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자그마한 것들의 세상을 알았고, 그것들에서 오는 진정한 기쁨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마 그녀가 웃을 때, 무엇보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원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길을 걷다가 모퉁이에서 나타난 커다란 개가 세리를 보고는 달려온 적이 있었다. 처음 그 개를 마주쳤을 때, 나와 비슷한 그 덩치를 가진 개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을 때, 나는 긴장한 채로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나는 저 개가 우리에게 가진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침내 개가 속력을 줄이지 않고 세리에게 도달하자, 나는 장딴지에 힘을 주고 개를 막아서려고 했으나, 세리가 더 빨랐다.

놀랄 틈도 없이 세리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개를 껴안았다. 개는 세리를 부드러운 잔디밭에 눕히고 꼬리를 흔들어 댔다. 놀란 나는 개를 세리에게서 때어내게 위해 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서 본 세리의 표정은 고통이 아닌 환희였다. 개는 세리의 얼굴을 정신없이 긴 혀로 핥고 있었고, 세리는 개의 침으로 반들반들해진 얼굴로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며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저 멀리서 노인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노인은 개를 보고, 세리를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누워있는 세리에게 인사를 건넸고, 누운 상태의 세리가 웃으며 답을 했다. 

그녀는 해가 지면 황금색 색깔의 털을 가진 활발한 성격의 커다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할아버지가 있다는 동네를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서 횡단보도를 졸졸 거리며 걷는 횡단보도를,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가게 안에 차려진 조그마한 사당에서 정성스레 의식을 치르고 가게를 오픈하는 중국 요리 전문점 사장을 알았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보내는 미소에서, 그녀가 중국집 사장과 나누는 농담 사이에서, 나는 삶의 진정성과 즐거움을 배우고 있었다. 세리는 내가 갇혀있는 얼음성에서 나를 강제로 끌어내기보다는, 내가 다시 한번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 어느 날 이였던가. 아침에 스콜이 내렸던 날이었던 것 같다. 짧은 스콜이 지나고, 늘 그렇듯이 해가 뜨며 강렬한 열기로 인해 맑은 거리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던 날이었다. 세리와 만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고, 나는 여느 아침처럼 세리가 묵고 있는 게스트 하우스 앞에 있는 카페에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세리와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날 세리가 세운 계획은 이것이었다. 점심은 보타닉 가든에서 보내고, 저녁은 이스트 코스트라는 이름의 해변 가에 위치한 유명한 식당인 노 사인보드에 들려서 칠리 크랩을 먹고는, 바로 옆에 위치한 브루웍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하자는 계획이었다. 즐거운 하루가 될 만한 훌륭한 계획이었다.      

보타닉 가든은 크고, 아름답고, 시원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게 넓은 공원이  각각의 테마로 나누어진 자그마한 공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길 양 쪽에 가득한 열대 식물들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싱가포르의 더위를 막아주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조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둥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문득 세리와 나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서로의 생활 스타일을 존중해 주고 있었고, 서로의 거리에 익숙해져 갔다. 나는 세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세리는 나와 거리를 조금 두고 싶어 했다. 먼저 다가왔던 세리가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조금 더 세리에게 시간을 주기로 하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거리로 인해 서로에게 일렁이던 불꽃의 강도가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하던 진한 키스의 농도도,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조금씩 대화의 시간이 줄어져 가고 있던 나날들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억지로라도 세리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내가 다가가는 것을 세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세리는 이미 나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이 아닐까. 사실 그 날 센토사 섬에서의 황홀한 마법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빠져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자그마한 정자를 발견했다. 흰색으로 말갛게 칠한 난간과 다소 뾰족한 지붕의 모양이 인상적인 정자였다. 안에 들어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지만 들어가게 된다면 편안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곳. 나는 세리의 손을 잡고 정자로 향했다. 과연. 안에 들어가자 비치되어 있는 자그마한 쿠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싱가포르인들의 공공의식에 감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세리는 피곤하다며 가로로 누워 내 다리를 베고 눈을 감았고, 나는 길게 늘어진 세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내가 깜짝 선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응?”

“나는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좋아. 막 두근두근 하는 것들 있잖아. 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발견한 예쁜 꽃이나 길을 걷다가 발견한 멋진 카페라던지 간판도 없는 허름한 바 같은 거 말이야. 그것도 그랬어. 준호가 내게 준 멀라이언 조각 말이야. 우와. 그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나무 조각이 그렇게 아름다운 조각으로 변할 줄이야. 내가 받아본 선물 중에 제일 놀라운 선물이었어.”

말을 마친 세리는 내게 조금 더 안겨 들었다. 익숙한 몸짓으로 동그랗게 몸을 만 세리는 마치 태어나기 전의 태아 같았다. 그 형태는 사랑을 갈구하는 형태이기도 했으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몸짓이었다. 그 둥그런 타원의 모양에서 나는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세리와 같이 한 싱가포르 생활은 전반적으로 좋았다. 즐거웠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가끔 마음 어디에선가 불안함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세리의 마음의 상처를 메워줄 수 있을까. 나의 상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끝없는 고민 속을 반복하던 나는 푹신한 쿠션과 시원한 그늘이 주는 안락감에 깜박 졸고 말았다.     

해변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고, 그 밤하늘 아래 검푸른 바닷물들이 조용히 넘실대고 있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조용하고 잔잔한 멜로디가 내 궁금증을 점점 증폭시키는 사이에 검은 바다에서 무언가가 불쑥하고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존재는 지난번에 봤던 작은 멀라이언이었다. “아저씨. 또 왔네요.”

“그래. 또 왔네. 근데 아저씨는 아닌데.” 

“아빠가 그랬어요. 나한테는 다 아저씨래요.”

“그렇군…. 아빠는 어디 있니?” 

“몰라요. 아저씨. 새우 없어요?”

“새우?” 

“그래요. 나는 새우 되게 좋아하거든요.” 

주머니를 뒤적거려보니 새우가 주머니 안에 있었다. 

“여기.” 

나는 새우를 멀라이언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작은 멀라이언은 새우를 통째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아빠가 그랬는데요. 여기 오는 인간들은 다 자기만의 길을 찾는 인간들이래요.

여기는 출발점이에요. 모두들 여기서부터 자신만의 길을 가죠. 원래는 사람들도 여기를 자주 왔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가끔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마 우리 생각이 가끔 나서 그런 거래요. 근데 사람들은 우리와 교류하는 법을 까먹었어요. 우리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그들이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다 건방지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질 않아요. 우리들을 기린다고 석상을 세우긴 하는데, 그건 그냥 돈 벌려고 하는 일이래요.”

멀라이언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한 마디를 덧 붙였다.

“아저씨. 돈이 많으면 행복해요?”

“글쎄…. 그런 것 같진 않아. 돈 많은 사람들도 괴로워하고, 다들 각자만의 고충이 있지.

사람들의 행복을 돈으로 판단할 순 없는 것 같아. 사실 돈 많은 사람들도 다 똑같이 살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그러고 살지. 돈 없는 사람들도 같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사랑을 해.”

“그래요?” 

“응. 그래.”

작은 멀라이언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투명한 회색 눈동자가 나를 관통하고, 내 정신을 관통하고, 내 자아를 관통했다. 내 자아도 얌전히 그 회색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요.”

“글쎄.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

“아니에요. 달라요.”

“뭐. 다를 수도 있겠지.”

“아빠가 쉽게 믿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말했어요. 진정한 믿음은 수많은 시련의 계단을 딛고 올라섰을 때, 그 단단한 반석으로 받쳐진다고 했어요.”

“…….”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시련의 계단. 단단한 반석.

“가끔 놀러 와요. 아저씨.”

멀라이언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검푸른 밤바다로 들어갔다. 다시 멜로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라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잠에서 깨었다.     

세리는 이미 잠에서 깨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옆에 앉아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흠-. 흠흠-. 어. 준호 깼어?” 

“응. 깼어.” 

“뭐야. 내가 잘 때 준호가 자면 어떻게 해. 내가 잘 때 준호가 날 지켜주고, 준호가 자는 동안은 내가 지켜줘야지.” 

“응. 그렇구나. 미안.”

세리의 표정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쉰 느낌이야.” 

세리는 조용히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벤치에서 일으켰다. 우리가 잠시 쉬는 동안, 강렬했던 한낮의 햇빛이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우리는 아까보다 한결 여유롭게 보타닉 가든을 산책했다. 온통 사방이 초록색인 낙원 안에서 세리와 나는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등 뒤로 깍지를 끼고 천천히 길을 걷는 세리의 뒷모습에서, 나는 어렴풋이 천국의 입구를 보았다. 그것은 나에게 잠시 동안 영원의 휴식을 맛보게 해주었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모든 것의 무게가 가파른 열기에 휩싸여 수증기로 사라졌고, 나는 현실에서 살짝, 아주 조금 떠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몸에 쌓였던 한기와 피로가 모두 사라지자, 나는 나라는 사람의 조각이 완성으로 모임을 알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세리와 함께함으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세리가 해가 지기 시작한 보타닉 가든의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며 나를 향해 웃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달빛 아래서 나와 함께했던 여자의 이름을 잊었다.     

저녁이 되고, 우리는 미리 예약해 놓은 이스트 코스트를 향해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세리는 택시에 탑승하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한 후에,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예순 정도 돼 보이는 택시 기사는 잠든 세리를 보더니 날 보고 윙크를 날렸다. 나는 세리가 깨지 않게 입모양으로만 웃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죠?” 

“저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하. 한국.” 

택시 기사는 잠든 세리를 보았는지 코너를 돌 때 좀 더 신중하게 도는 것 같았다. 자그마한 배려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택시 기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곳에 많이들 오죠. 정말 많이 와요.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열정적이에요.” 열정적이라는 부분을 설명할 때 택시 기사는 싱긋 웃었다. 

“열정적이면서도, 얌전하고, 수줍어하고, 뭔가…. 고매한 품위 같은 것도 있고요. 당신이 생각하는 싱가포르는 어떤 가요?”

“음….” 

나는 깊이 잠든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을 생각했다.

“도시는 깨끗하고, 안전하며, 사람들을 위한 휴식 공간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배려 있고, 순박하고, 여유롭죠. 밤거리가 이렇게 안전한 나라는 몇 없을 겁니다.”

세리가 푸우 우-. 하고 조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손을 뻗어 세리의 앞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그리고…. 이 여인을 만난 곳이기도 하지요.”

“하하. 내 마누라만큼은 아니지만 아름답군요.”

택시 기사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솔직하면서도, 소박한 사람이다. 잠시 후, 도심을 달리던 택시가 해변이 보이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지는 석양에 물든 해변은 아름답다. 석양은 정열적인 붉은빛으로 바다와 해변을 물들임으로 자신의 현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곧, 시간이 흐르고 미래가 다가오자 석양은 겸허히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석양은 알고 있었다. 매일 하루가 시작되고, 자신의 시간이 끝남으로 인해 곧 밤이 다가오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소박한 택시 기사의 배려 속에서 석양이 지고 있는 도로변을 달렸다.

이스트 코스트에 도착하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한 도로를 따라 곳곳에 위치한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세리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어 세리를 깨웠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 좋은 여행. 좋은 사랑 하세요.”

택시 기사가 떠나자, 잠에서 덜 깬 표정의 세리가 눈을 감고 나에게 안겨왔다.

“흐응…. 졸려어….”

나는 세리를 안고 한 손으로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응…. 준호. 주위에 간판 보이지?”

“응. 가게가 많네.”

“그중에 ‘노 사인보드(No Signboard)’라고 적힌 간판 좀 찾아봐.”

나는 고개를 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왼쪽 대각선 방향 쪽에서 커다란 게의 그림 옆에 파란색 글씨로 ‘No Signboard’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음…. 내 손 잡아줘.”

세리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세리의 손을 맞잡았다. 따뜻하고, 자그마한 손이다.

“데려다줘.”

나는 세리의 손을 잡고 천천히 ‘노 사인보드’로 향했다. 세리는 눈을 감은 상태였다. 나는 세리에게 바닥에 있는 자그마한 돌과, 움푹 파여 있는 구덩이의 위치를 가르쳐 주며 세리의 앞에 서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세리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가게에 도착한 나는 세리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의자에 앉은 세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나에 대한 신뢰의 빛이 어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하고는, 세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칠리 크랩입니다.” 

점원이 커다란 흰 접시 안에 담긴 칠리 크랩을 내려놓았다. 싱가포르의 대게는 한국의 대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얇고 긴 우리나라의 게와는 달리 꽤나 두툼하고 짜리 몽땅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리의 손과 비슷한 크기의 집게발의 크기가 인상적이었다.  

“어때?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칠리 크랩이야. 내가 매우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고.” 

나는 대게의 집게를 들어 버릇처럼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하지만, 한국의 게와는 달리 매우 단단한 껍질이 순식간에 내 송곳니를 강력하게 밀어냈다. 나는 송곳니에 통증을 느끼고 게를 다시 그릇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세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두르지 마. 우리의 시간은 많아. 먼저 시범을 보여줄게.”

세리가 테이블에 비치되어있는 커다란 가위와 조그마한 나무망치를 들고 크랩의 껍질을 몇 번 내리치자 하얗고 육즙이 가득해 보이는 하얀 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리는 솜씨 좋게 게를 해체하고는 내 접시에 신선해 보이는 살과 주황색의 소스를 가득 담아 주었다.

만족할 만한 식사였다. 게는 신선하며 달콤했고, 소스는 내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매웠다. 세리도 만족했는지 식탁에 고개를 얹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아. 매일 준호랑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 준호가 옆에 있어주고, 준호가 아직도 자고 있으면 숨바꼭질하고, 아침은 꼭 카야 토스트로. 거기 토스트랑 커피는 되게 달콤한데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거든. 마치 준호 같아.

그리고 오후는 오늘처럼 보타닉 가든에서 산책을 하고, 서로를 지켜주고. 밤이면….” 

세리가 요염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어 주고는 세리의 입가에 묻은 칠리소스를 닦아 주었다. 그래. 나의 걱정은 괜한 기우였던 것이다. 어떻게 늘 사랑이 불타오를 수 있겠는가. 가끔은 줄어들고 가끔은 늘어나는 것이 마음이 아닌가. 나는 보타닉 가든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걱정을 묻어두고 세리에게 웃어 주었다.

“그래. 나도 세리와 같은 마음이야.”     

그날 밤 호텔에서. 비로소 우리는 서로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노 사인 보드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택시를 잡았고 나는 오늘이 세리의 휴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택시 기사에게 평소와 다르게 클락 키가 아닌 래플즈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고, 세리의 표정이 조금 굳는 것을 느꼈다. 굳는 세리의 표정을 발견한 나는 손을 뻗어 세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호텔로 도착했을 때, 나는 세리에게 

“잘 가.”

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고, 그 의미를 알아챈 세리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내 방으로 세리가 들어왔을 때, 어둠의 장막 속에 솟아오른 자그마한 조명 아래서 우리는 천천히 서로의 옷을 벗겼다. 세리의 말 대로 우리의 시간은 많았다. 나는 일 분, 일 초를 천천히 공들여 세리를 연구했다. 그녀의 더 깊은 곳을 알고 싶었다. 한 층, 한 층, 나는 세리라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 나선형의 계단 끝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잡고 싶었다.  

세리는 어렸고, 자신의 생명력을 통제하는 법을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듯했다. 세리는 순식간에 정상에 도달했다가, 다시 급하게 능선을 내려오고, 다시 급하게 뛰어올라가는 행위를 반복했다. 나는 세리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능선을 오르게끔 도와주었다.

관계가 끝나고 나서, 가운을 걸친 우리는 베란다에 비치되어 있는 긴 벤치에 누워 싱가포르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우리의 미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같이 이 깨끗하고 친절하고 여유가 넘치는 나라에서 같이 살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완전히 발현된 생각이라기보다는 생각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나는 내가 말한 말에 당황하여 세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세리의 눈에 이채로운 빛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아까 전에 노 사인보드에서 본 신뢰의 눈빛이었다. 그래. 저 눈빛이었구나. 나는 아까 전의 생각의 씨앗이 어느 토양에서 발아했는지를 깨달았다.   

“야쿤 카야 토스트보다 더욱 달콤한 토스트를 만들자!”

나에게 돌아온 세리의 메아리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칠리 크랩은 전혀 맵지가 않아. 더 매운 대게 요리를 보여주자!” 

“김치를 같이 내는 건 어때?” 

“사랑하는 연인들이 가끔 온다면, 방을 따로 준비해주자.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은 존중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 

어떻게 살아갈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멈추지 않았다. 수십 가지의 정형화되지 않은(대부분이 현실성이 없었지만) 아이디어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계속해서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밤, 우리는 희망에 부푼 계획을 떠드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온갖 예술품을 만들어 팔기로 하고, 세리는 자그마한 바를 차려 노래를 부른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나왔을 때에는, 저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우리는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꿈꾸는 것 자체가 행복한 젊음이었으니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우리는 단지 여행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는 점점 아물어 갔다. 세리가 소개하여주는 싱가포르의 관광지에서, 우리가 같이 먹는 식당에서, 우리가 손을 잡고 걷는 찌는 듯이 무더운 아담한 거리들에서 우리는 웃고,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고, 현실을 공유했다.

가끔 상처받은 과거가 그 흐릿한 안개를 뚫고 잠시 고개를 내밀어도, 우리는 곧 다시 현재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의 상처는 깊었고, 현재는 아름다웠기에 굳이 과거를 꺼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의 상처를 서로 진실 아래 드러냈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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