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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3.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8-

약속 -1-

춥고 허전했다. 옆에 있던 세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미처 눈을 뜨기 전에 빗방울들의 창문을 때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부스스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간밤에 열어놓은 창문을 열어놓았던 것이었을까. 열려있는 창문 아래 서 있던 멀라이언 조각이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맞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서 창문을 닫고 조각에 묻은 빗방울들을 닦았다. 나는 조각에 칠을 하여 방수를 해놓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며 수건으로 조각에 묻은 물방울들을 닦아냈다. 최대한 수분을 닦아내기는 했지만, 이 나무가 이미 스며든 습기를 이겨 낼 수 있을 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이다. 세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나는 책상 위에 조그마한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동안 심장이 요동쳤다. 설마. 그녀가 떠난 걸까. 

‘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깨울 생각을 못했어. 짐을 챙겨올게. 잠시만 기다려.’

나는 책상 근처에서 담배를 찾아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아래서 아련한 담배 연기가 공중에 흩어졌다. 머릿속에는 어제 세리와 같이 걸었던 보타닉 가든의 푸르른 생명력과, 세리의 머리를 어깨에 얹고 바라보던 해변의 풍경들, 세리와 같이 먹었던 칠리 크랩, 세리의 땀방울…. 그리고 오늘 새벽까지 열정이 가득한 미래를 꿈꾸던 우리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온 나는 잠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세리가 없는 잠깐의 시간이라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아직 먹구름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안절부절 하던 나는 샤워를 하고 편한 차림으로 로비로 향했다.     

호텔의 로비는 부산했다. 나는 이제 막 체크인을 하는 외국인 부부들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들, 식사를 하러 방에서 나온 사람들로 인해 떠들썩한 로비를 지나 호텔의 정문으로 나와 세리를 기다렸다. 

그 때, 까만 메르세데스 벤츠 한 대가 빗속을 뚫고 미끄러지듯이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흠집 하나 없이 깔끔한 차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세련된 그 차체가 멈추고, 기사가 내려서 커다란 검정 우산을 펼쳤다. 펑. 하고 우산이 펼쳐지자, 운전기사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 광경에서 눈을 땔 수 없었는데, 나의 육감이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매끄러운 발목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위로 매끈하고, 육감적인 종아리와 허벅지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한 여자. 큰 키. 풍만한 몸매. 하얀색의 피부. 빈틈이 없을 것 같은 표정.

날 버리고 떠난 여자였다.

세상은 멈추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도 날 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특유의 보조개가 파이는 미소를 지으며 

“준호야.” 

라고 부른다.

그제야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고, 내 몸이 굳는다. 지난밤에 이불에서 세리에게서 얻었던 따스한 온기가 모두 달아나고 차가운 서리가 내 현실에 하얗게 서렸다. 어정쩡하게 그녀에게 벗어나려 하다가 꽈당-. 하고 호텔 로비에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마치 SF 영화에서 우주생명체에게 쫓기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는 로비를 허겁지겁 뛰어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다행히도 그녀는 나를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근데, 나는 왜 그녀의 앞에서 도망 쳤을까? 나는 호텔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멀라이언 석상 옆에 앉아 잠시 동안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내가 도망칠 이유는 없다. 근데 왜 도망친 거지? 

사실은 그녀가 두려웠을 뿐이다. 무엇이 두렵지? 그녀가 다시 내 인생에 들어 올까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서율.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떠오른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의 첫 여자. 나의 상처.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아직 서율이 로비에 있는지 확인부터 해보았다. 다행히 서율은 체크인을 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로비에 있는 푹신한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서율은 왜 싱가포르에 왔을까. 왜 하필 이 호텔에 묵었을까. 서율은 왜 내게 인사를 했을까. 나는 마치 어제도 나와 같이 보낸 것처럼 친숙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가 무서웠다.

“준호야.” 

고개를 들어보니 세리가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세리의 뒤에 발랄한 분홍색의 귀여운 색깔의 캐리어 두 개가 서 있었다.

“나왔어. 근데 안색이 안 좋아. 무슨 일 있는 거야?” 

세리는 내 옆에 앉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아니, 아니야. 잠깐 생각할게 있어서.” 

“내 생각?” 

세리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매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응. 네 생각.”

머리가 복잡했다. 잊었던 물음표가 두꺼운 얼음을 뚫고 솟아올랐다. 서율. 그녀를 만나서 왜 나를 버렸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는 내게 어떤 답을 줄까?

우리 둘은 방을 나서서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아직 먹구름이 다 걷히지는 않았지만, 일단 비는 멈췄다. 나는 기분 전환 겸 세리와 산책을 하기위해 간 센텍 시티에서 있는 퀴신보 라는 이름의 일식 해산물 뷔페를 발견했다. 

커다란 새우. 싱싱한 가리비. 식욕을 돋우는 붉은색의 대게. 윤기가 흐르는 연어 초밥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세리가 접시에 가득 담아오는 해산물들을 보며 서율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리가 내 눈 앞에 접시를 들이 밀 때 까지도 난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서율…. 서율…. 서율….

“준호!” 

세리가 워낙 크게 내 이름을 부른 탓에 주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 쪽 테이블을 쳐다봤다. 

“으,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냐…. 밥 먹자. 밥.”

“무슨 일 있지?”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

나는 커다란 대게 다리를 하나 잡아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고, 껍질에서 나온 하얀색의 대게 살을 세리의 앞 접시에 놓았을 때 본 의문스러운 표정의 세리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퀴신보에서 나온 우리는 더위가 한 풀 꺾인 저녁 길을 걸었다. 우리의 걸음이 클락 키의 강변에 닿았을 때,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 강렬한 비바람이 되어 세상을 강타했고, 나는 세리를 품에 안고 근처에 적당한 피난처가 있는지 둘러다가 어떠 가게를 발견했다. 

세리가 예전에 말했던 좋아하는 목록에 있던 ‘간판 없고 허름한 바’였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몇 몇이 바에 앉아 술잔을 들이키는 모습이 보였다. 뛸 듯이 기뻐하는 세리를 데리고 바로 향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무심한 가게주인이 우리를 쳐다보았고(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마저도 세리는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조니 워커 블랙을 한 병 시켰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했던 조니 워커 블랙이 테이블위에 놓여 졌고, 빠르게 음료와 잔, 안주들이 깔렸다.

“완벽해.”

세리는 기쁨에 이기 못한 탓인지 박수를 몇 번 쳤는데. 덕분에 가게의 손님 몇 몇이 우리를 잠시 주시했다. 내가 미안하다는 뜻의 제스처를 취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위스키를 언더락 잔에 반 쯤 차있는 얼음에 희석을 시킨 것을 한 모금 마시자 나는 세리에게 말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갑자기 현재로 불쑥 끼어든 과거에 대해서. 

“세리야.” 

“응?”

대충 썰어진 사과 조각을 집어 들던 세리가 날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어.”

“응.”

세리가 사과 조각을 내려놓았다. 나는 포크를 들어 사과 조각을 찍어 세리의 입에 조심스럽게 가져다주었다. 세리는 조금 커진 눈을 하고는 앞니로 사과 조각을 물어 입 안으로 당겼다.

“지난 번에 말했던 그 여자 있잖아. 그 여자가 인생의 첫 여자였어. 그 여자가 날 좋다고 했고, 나도 그 여자가 싫진 않았어. 그렇다고 딱히 좋지도 않았지.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갑자기 내게 잠자리를 요구했지.”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나는 섹스도 처음이었어. 근데, 여자가 날 버리고 떠났어. 그게 내 첫사랑이야. 그리고…”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세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세리가 내 머리를 껴안아 주길 바라고 있었다. ‘괜찮아.’ 하고 나를 토닥여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더 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나머지 말들을 깊숙이 삼켰다.

‘그 여자가 지금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 왔어. 그리고 내게 인사를 했어. 준호야. 하고. 엄청나게 차분한 인사여서 나는 그 여자가 내게 그토록 폭력적인 이별을 행한 여자와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냥. 그 여자의 입 옆에 얇게 페인 보조개만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어.

근데 그토록 차분한 그 여자가 너무나 무서웠어. 그 여자는 아주 차가운 여자야. 내게 그런 이별을 고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다시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아주 차가운 심장을 가진 여자야.’

“봐. 준호야.” 

세리는 양손을 내 뺨에 대고 내 머리를 살짝 당겼다. 그녀의 이마와 내 이마가 만나고, 그녀의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와 버석거리는 내 짧은 머리가 섞였다. 

“괜찮아. 괜찮아.” 

세리는 조용히 날 어루만졌다. 

“내가 옆에 있어. 괜찮아.”

비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잔을 비웠다. 나는 언더 락으로, 세리는 스트레이트로. 문득 술잔을 비우던 우리는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웃었다.

“그래. 세리가 있으니 괜찮아.”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비가 그쳤다. 나는 위스키의 계산을 끝내고 세리와 함께 바를 나왔다. 밖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세리야.” 

“응?” 

“고마워.”      

꿈을 꿨다. 나는 보타닉 가든에서 세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기저기 잎을 늘이고 서 있는 나무들에게 서리가 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날씨가 너무 추웠고, 나는 세리가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세리의 파랬던 입술. 어서 세리를 찾아 따뜻한 음료를 같이 나눠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세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갈라지더니 갈라진 틈에서 거대한 서율의 얼굴이 나왔다. 

“준호야. 준호야. 준호야.” 

서율은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만. 그만해!” 

나는 서율에게 도망치려 했지만 거대한 서율의 얼굴은 날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준호야. 준호야. 준호야.” 

서율의 거대한 입에서 내 이름이 울려 나올 때 마다 보타닉 가든 전체가 점점 얼어붙었다. 꽃들에 성에가 끼었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기 시작한 나무들의 높은 가지에 고드름이 생겨났다.

나는 거대한 얼음의 세계에서 뛰어다니며 세리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보았지만 세리는 보이지 않고, 서율의 얼굴은 점점 내 이름을 크게 부르짖기 시작했다. 

“준호야! 준호야!! 준호야아!!!”

고드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 시작한 나무들을 피해 세리를 찾던 나는 벤치에 누워 평온하게 자고 있는 세리를 발견했다.

“세리야!” 

그 때, 세리의 머리위에 길게 고드름을 드리우고 있던 야자수가 굉음을 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타자를 치던 손가락을 멈추고 머리를 감쌌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깊은 곳에 갇혀 있던 과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고 결국 과거에서 탈출하여 현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도 그 이야기를 잊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잊기에는 영겁의 시간도 모자를 것임을.

창가에 드리운 블라인드를 걷자 잿빛 서울이 나타났다. 지난여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번 여름은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이젠 장마철이 아니라 우기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이 여름의 서울에서 나는 예전 풋내기 시절의 사랑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옆에 있는 커다랗고, 자그마한 멀라이언 두 마리와 새우, 그리고 소라 껍데기가 들어 있는 스노우볼 하나를 집어서 흔들었다. 유리 세계 안에 흰 눈이 내렸다. 흩날리는 눈 안에 서있는 세리와 내가 보였다. 

스노우볼 안의 세리와 나는 손을 잡고 계속해서 내리는 눈을 헤쳐 가며 걷고 있었다. 눈이 그들의 다리를 덮고 허리를 넘을 지경이었지만 세리와 나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랬다. 둘이 함께였고, 서로를 사랑했던 시절이여서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잠시 후에 흩날리던 눈이 모두 내려앉고, 과거의 세리와 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노트북으로 다가가 앉았다. 조금 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써야만 했다.          

지독한 꿈이었군. 꿈에서 깬 나는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세리가 고요한 얼굴로 평온하게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쉰 후에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베란다로 향했다.

아직 밤이었고, 저 멀리 해변에서 사람들이 폭죽놀이를 즐기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의 해변 위로 솟아오른 화려한 불꽃들이 점점이 퍼져나갔다.

치익-. 담배에 불을 붙였다. 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선명했던 영상들. 커다란 서율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추위가 가득했던 보타닉 가든과 불타던 나무들. 그리고 세리. 

단지 꿈이야. 그럴 거야. 나는 담배를 눌러 끄고 다시 세리가 있는 침대로 향했다.

잠들기 전에 문득 옛날에 읽었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있던 내용들이 떠올랐고, 나는 그 책에 써진 방법으로 나의 꿈을 해석해보았다.

아무래도 서율에 대한 불안함이 꿈의 이유인 것 같았지만, 꿈에서 나의 곁에 왜 세리가 없었고, 세리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잠들어 있었는지. 왜 고드름이 세리의 얼굴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준호야. 보타닉 가든 가자.” 

세리가 눈을 뜨자마자 내뱉은 한마디는 나를 어젯밤의 꿈속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으,응?” 

“보타닉 가든. 나 거기 또 가고 싶어. 거기서 낮잠 자면 너무 편안해.”

“그래. 세리가 가고 싶으면 가야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방을 나섰다.

어젯밤 꿈과는 달리 보타닉 가든은 여전히 평온했다. 나는 혹여나 서율의 거대한 얼굴이 등장 할까봐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았다.

“준호야.” 

“어, 왜? 오늘 되게 멍하다.” 

“응. 원래 멍해.” 

나는 세리의 말에 짧게 대답 해 주고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 뭐 있나봐?” 

“…….” 

“준호. 뭔 일 있지?”

“아냐, 없어.” 

“있어.”

“없어.” 

“있어.” 

“없어.”

세리와 나는 있어, 없어를 번갈아 대답해가며 보타닉 가든을 산책했다. 평화로운 야자수 나무들과 요염하도록 붉은 장미들을 보며 내 마음도 점점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어. 여긴 평화로운 보타닉 가든이고, 세리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때, 누군가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에 호텔에서 마주친 차림 그대로 서율이 걸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꽤 큰 키가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전신이 달라붙는 검정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전혀 더워 보이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가볍게 조깅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둠 너머의 두 눈동자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 저 여자 봐. 운동복 차림인데 엄청 당당하네. 우리나라 사람 같은데? 가서 말 걸어 볼까?”

“아냐, 난 지금 우리 둘이 다니는 게 더 좋아. 쓸데없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율이 우리 쪽을 향해 통통, 하고 뛰어왔다. 전혀 어색하지 않은 흐름이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서율이 그 예의 보조개가 파이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세리가 서율에게 인사를 건넬 때. 나는 어젯밤의 꿈의 파편을 떠올렸다.

“옆에 계신 분은 남자친구……?” 

서율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네. 제 사랑스러운 남자친구에요.” 

세리가 내 팔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볼을 비볐다.

서율이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서율은 여기서 우리를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며, 우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이 오늘 저녁 사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세리가 큰 소리로

“좋아요!”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나는 어느새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시티 홀(City Hall) 역 근처에 있는 차임스로 끌려가고 있었다.

차임스는 오래전에 지어졌던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수도원이었는데, 싱가포르에서 오래되고 역사가 깊은 건물은 철거를 만류하는 싱가포르의 법률에 의해 레스토랑과 바(Bar)들로 가득 찬 상업지구로 탈바꿈한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과연, 과거에 수도원이었던 곳인 만큼 도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낡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분수대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키 작고 잎이 풍성한 나무들이 긴장된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해 주었다. 

서율이 우리 둘을 데리고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레스토랑의 입구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우리를 맞았고, 잠시 후에 식전 빵과 포도주가 나왔다.

“와. 이 빵 정말 부드러워!”

감탄사를 연발하며 식전 빵을 입에 미어터지도록 넣던 세리가 포도주를 한 잔 들이켜고, 숨을 돌렸다. 나는 냅킨을 들어 세리의 입을 닦아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세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서율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싱가포르엔 뭘 하러 오셨다고요?” 

“헤어졌던 남자친구를 찾으려고요. 남자친구가 저와 헤어진 후에 이 싱가포르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아직 그를 사랑하거든요.”

맥주를 들이키던 나는 하마터면 맥주를 뿜을 뻔 했다. 나는 세리가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서율을 노려본다. 웨이터가 날라 오는 에피타이저 접시를 쳐다보던 세리가 서율의 말을 듣고, 다시 서율에게 시선을 돌린다. 

“우와, 멋지다! 남자친구 꼭 찾길 바랄게요. 난 이미 찾았지만. 헤헤. 우리는 행복하니까, 서율 씨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고마워요.” 

“그치. 준호야?”

“응.”

아니야. 저 여자는 행복할 권리가 없어. 

에피타이저를 음미하던 세리가 한창 서율과 수다를 떨던 중, 우리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이프와 포크를 놓고 서율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뭘?”

서율은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나이프로 익숙하고 절제된 몸짓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레어에 가깝게 조리된 스테이크의 단면에서, 핏물이 배어나와 접시에 고였다. 나는 서율이 들고 있는 나이프로 내 심장을 써는 장면을 상상했다. 

“역시 여전하구나. 시치미 잘 떼는 건.” 

스테이크를 썰어낸 서율이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야. 나는 업무 때문에 여길 왔고, 너와 세리를 우연치 않게 보타닉 가든에서 만난 거야. 내가 뭐 첩보요원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나에게 실시간으로 너의 위치를 추적할 그런 기술 따윈 없어. 네가 이 나라에 왔다는 것도 몰랐고.”

“그럼. 왜 세리에게 그런 말을 한거지? 남자친구를 찾으러 왔다고?”

“….”

서율이 대답을 하지 않고,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접시에 흐르던 핏물이 한 층 더 붉은색으로 변했다.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다 댄 서율이 대화 주제를 돌렸다.

“뭐. 설마 내가 너와 세리를 떼어놓으려고 지금 여기 온 것 같아? 내가 왜? 난 재활용에는 관심 없어.”

“그럼 왜?”

“세리가 마음에 들거든. 생명력이 넘치고, 아름답진 않지만 매력적이야. 매력이라는 것은 쉽게 발견하기 힘들거든. 그래서 흥미가 생겨. 희귀한 것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때의 너처럼 말이야.” 

저 멀리 세리가 코너를 돌아 우리 테이블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세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서율이 한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이 여자는 믿을 수 없는 여자였고 따라서 그녀가 한 말들 중에는 거짓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거짓일까. 알 수 없다.     

하나, 둘, 셋…. 텅 빈 와인 병이 무려 세 병에 이르렀다. 나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세리를 업고 택시를 잡았다. 서율은 내 눈총을 무시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왜. 신경 쓰여?” 

서율의 평온한 목소리가 내 등에 꽂혔다. 나의 손짓을 발견한 택시가 우리 앞에 멈췄고, 나는 조심스럽게 세리를 택시 안쪽 좌석에 눕힌 후에 택시의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앞좌석의 문이 열리더니 서율이 긴 다리를 쓱 하고 집어넣었다. 젊은 택시기사의 눈길이 서율의 다리로 향했다. 시선을 느낀 서율이 스커트를 정돈하는 듯한 손짓으로 스커트를 조금 더 올렸다. 나는 어느 순간 택시기사의 눈이 서율의 다리로 발사 되어서 우리가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나는 서율에게 한국어로 경고했다. 

“그만하시지.” 

“왜. 좋다는데.” 

나는 서율을 무시하고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출발시키며 서율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택시가 호텔에 도착하자, 택시 기사는 서율에게 혹시나 택시가 필요하다면 ‘당신을 위해서’ 어디서든 달려올 것임을 당부하고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택시비는 다음에 받겠다고 말하며 서율에게 쑥스러운 미소를 건넨 기사를 태운 택시가 호텔을 떠나 어두운 밤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서율이 핸드백에서 라이터를 꺼내 택시 기사가 건넨 종이에 불을 붙였다. 

“…. 늘 사람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아니야. 기브 앤 테이크. 저 남자는 내게서 잠시 즐거움을 얻었고, 나는 택시비를 공제 받은 거야. 전 세계에서 통하는 법칙이지.”

“기브 앤 테이크 따위가 아니라 너는 사람을 기만 하는 거야. 본질을 감추고 껍데기만 보여주지. 상대에게 알맹이를 줄 것처럼 행동하면서 껍데기를 주고, 진짜 너는 끝까지 감췄다가 마지막에 치명타를 날릴 때만 등장하는 거야.”
 서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와 세리를 위해서 한 것처럼, 호텔 직원을 불러 세리를 등에 업은 내가 문을 통과 할 때 까지, 문을 열고 있어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문을 통과할 때, 호텔 직원은 내게

“좋은 친구 분을 두셨군요.”

라고 말했고, 나는 직원에게 억지웃음을 지어주었다.     

서율은 문을 통과 한 후에도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왔다.

“예쁜 친구네. 까맣고, 조그맣고, 이마가 넓은….”

서율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길고 긴 복도를 지나 방에 도달한 나는 세리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누운 세리는 조그맣게 몸을 말았다.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도중, 내 등에 부드럽고, 둥근 원형의 고체가 느껴졌다.

“하아…. 여전히 따뜻하네.” 

서율의 팔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서율을 뿌리치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서율의 눈과 마주쳤다.

마주친 갈색의 눈이 공허로 가득 차있다. 옛날과 그대로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저며 오는 가슴을 외면하고는 서율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의외로 서율은 저항 없이 순순히 따라왔다. 나는 방문을 닫고 나서, 서율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네 방은 여기가 아닐 텐데.”

“어디서 잠을 자든, 난 상관없어.”

나는 서율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시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다시 세리에게로 돌아갔다. 세리가 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수건에 물을 적셔 세리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세리의 옷을 갈아입히며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는 

‘어디서 잠을 자든, 난 상관없어.’

라고 말할 때 나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서율의 미소가 자꾸만 나를 짜증나게 했기 때문에, 잠들기 전에 몇 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내 불편한 시선 속에서 서율과 세리는 점점 친해졌다. 서율은 세리보다 일곱 살이 많았기 때문에 세리는 서율을 ‘언니’라고 불렀고, 서율은 세리에게 깍듯이 ‘세리 씨.’ 라고 불렀다.

세리는 서율이 자신이 한참 어리지만 존댓말을 써주는 것을 보니 매우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했고, 나는 속으로 그것은 그저 겉치레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서율은 싱가포르 내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서 세리와 나에게 그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나와 같이 보냈던 시간을 세리에게 이야기하며 숙련된 경매인답게 이야기속의 나를 제거하고, 마치 아름다운 동화처럼 포장해서 세리에게 들려주곤 했다. 세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나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것이 슬펐고, 세리가 그 이야기를 동경하는 것이 더욱 더 슬펐다.     

세리와 서율이 만난 지 제법 지난 어느 날, 점심 무렵에 주롱 새 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세리는 래플즈 호텔의 일 층 야외 카페에서 서율의 관광 안내를 도와줄 겸 남자 친구를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언니가 우리에게 너무 잘해줘서…. 우리도 언니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요. 아마 그 사람도 유명한 관광지들을 돌아다니고 있을 걸요? 우리 딱히 할 일도 없구요. 그치. 준호야?” 

세리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 으…으응. 그래.”

“그래서요. 오늘은 일단 ‘주롱 새 공원’으로 가볼까 해요. 거기 우리나라 사람 엄청 많아요. 그러니까 아마 언니의 미래의 남자친구도 거기 있을 수도 있어요. 아마 운 좋으면 오늘 당장 찾을 지도?”  

“어머. 고마워요. 두 분 다 너무 친절하세요.” 

활짝 웃는 서율의 고급스러운 선글라스 안에서 눈동자가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세리를 보고 웃었다.      

주롱 새 공원은 ‘세계 최대의 새 공원’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다양하고 특색이 넘치는 여러 가지 테마로 나누어져 있었다. 세리는 입구에서 나눠주는 안내 책자를 들고 펭귄 퍼레이드, 플라밍고 풀, 폭포 새장 등의 각 구역마다 가진 특징을 열심히 서율에게 설명했다. 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그럼 우리 펭귄 구역부터 돌아볼까요?”

세리는 서율과 내 앞에 서서 의욕에 찬 발걸음으로 펭귄 구역으로 향했다. 우리는 사육사가 양동이에 얼음을 가져와 풀장에 풀어 넣는 것을 지켜보았고, 펭귄들이 그 얼음에 뛰어들어서 만족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지만, 세리는 펭귄들이 웃는 표정이었다고 말했다).

세리의 열정적인 발자국이 주롱 새 공원을 점점이 수놓았다. 아침 일찍 나온 덕분에 관람 시간은 넉넉했고, 우리는 급할 것이 없었다. 세리는 서율과 나를 이끌고 공원 곳곳을 구경했다. 플라밍고 풀에서는 매혹적인 핑크 빛으로 치장한 홍학들이 기다란 목을 아래로 내려 물을 마시는 모습을 구경했고(그 새들은 간혹 깩-. 하는 아주 거칠고 커다란 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들은 무슨 의미로 깩-. 한 것일까.) 리버 라인에서는 귀엽게 생긴 청둥오리들이 짧은 꼬리를 파닥이며 연못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연못 앞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오리들을 보며 ‘꽥-. 꽥-.’ 하고 오리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오리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뭍으로 올라와 ‘꽥-. 꽥-.’하며 다가오는 모습이 아주 귀여워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들을 보며 웃는 우리를 본 아이들도 우리에게 웃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폭포 새장은 마치 태고의 자연 같은 장엄한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높고 차가운 폭포에서 시원하게 물이 쏟아졌고, 그 폭포 주위를 알록달록한 색깔의 자그마한 새들이 지저귀며 날고 있었다. 우리는 서율이 구입한 레몬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그 광경을 구경했다. 

“….”

아이스크림에 꽂힌 막대 과자를 입에 물고 폭포를 올려다보는 세리의 모습이 마치 어느 신화에서 나온 여신 같아서,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 같은 아주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언니. 여기가요. 아시아 최고의 하우스 메이킹 비어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해요. 여기 사람 보다 훨씬 큰 맥주 통 좀 봐요! 아주 유명한 곳이니까 남자친구라는 분도 여기에 한 번 쯤은 올 거예요.” 

브루웍스 에서도 세리의 가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세리는 목에 살짝 핏대까지 올리며 서율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다. 서율은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세리의 열변에 동의를 표했다.

직원에게 주문한 연어 샐러드와 고르곤 졸라 피자, 그리고 킹 쉬림프 구이가 나오자 서율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두 분에게 건배.” 

하고 잔을 치켜들었다. 

“서율 언니와 서율 언니의 미래의 남자친구에게 건배!” 

세리가 신난 듯한 동작으로 서율의 건배를 받았다.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세리의 접시에 껍질을 발라낸 먹음직스러운 킹 쉬림프 한 마리를 놓아주었고, 서율은 맥주잔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은 늘 인정하지 않았지만, 세리는 쉽게 술에 취하는 체질이었다. 서율이 주문한 맥주가 매우 좋은 맛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세리는 맥주를 너무 마셨다. 술에 취하면 자꾸만 몸이 고꾸라지는 세리를 업고 가게를 나와 클락 키의 강변을 걸었고, 내 뒤로 서율이 세리의 가방을 들고 내 뒤를 따라왔다 .길거리에는 무더위를 강변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로 씻어내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각국의 사람들. 노란색의 머리와 하얀 피부, 검정색의 피부와 곱슬거리는 머리칼, 노란색의 피부와 강인해 보이는 인상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나라에 모였을까. 단순한 휴식일까. 과거와의 재회 일까.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일까.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할 때 까지, 서율은 말이 없었다. 지난번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태도가 신경 쓰였지만, 곧 다시 등에 업힌 세리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방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세리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세리가 툭. 하고 핫팬츠를 벗어 던졌다. 덕분에 세리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고, 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세리의 검정 핫팬츠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때, 세리의 핫팬츠에서 툭-.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핑크색의 앙증맞은 지갑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세리의 지갑을 열었고,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세리와 낯선 남자가 서로 안고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남자는 언뜻 보면 고등학생으로 보일만큼 어려보이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사진속의 세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세리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세리의 몸이 조그맣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배낭을 뒤적여 노트를 꺼냈다.     

‘세리의 지갑에서 낯선 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낯선 남자의 얼굴이 아주 앳되다. 얼핏 보면 고등학생으로 느껴질 정도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남자와, 다른 얼굴로 사진을 찍은 세리.

사진속의 세리의 얼굴도 낯설다.’

나는 노트를 덮고, 침대에 누워 세리의 옆에 누워 잠시 천장을 노려보다가 잠깐. 아주 찰나의 순간 서율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불멸의 신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방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

내 영혼 안에는 인도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

한번은 카페에서 술 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하며 싸웠다.‘     

나는 산도르 마라이의 ‘하늘과 땅’을 덮고 해먹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멀라이언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멀라이언은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회색의 비늘이 턱시도 아래서 반짝였다.

“안녕하십니까.”

“오. 안녕하신가.”

거대한 꼬리가 능숙하게 움직이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멀라이언은 내 해먹이 걸쳐져 있는 야자수 옆에 서서 내게 말을 건넸다.

“꼬마에게 들었네. 새우를 선물해줬다면서.”

“네.”

“고맙네. 어떤 선물이든 선물은 좋은 것이지. 그래서 나도 선물을 준비 했다네.”

멀라이언은 턱시도 안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소라 껍데기를 꺼냈다.

나는 소라 껍데기를 받아 들었다. 청색과 주황색이 아름답게 섞여있는 무늬가 아름다웠다. 

“좋은 친구였지. 그런 그가 살았던 집이니 매우 좋은 집이 틀림없네. 자네가 들어가기는 매우 비좁겠지만. 그 집에 귀를 가져가면 마음이 편해 질 거야. 자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준비해왔네.”

“감사합니다.”

멀라이언은 거대한 턱시도를 벗어 야자수에 걸었다. 검은색의 턱시도가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그래. 하고 있던 일은 잘되나?”

“어떤…?”

“자네 자신이 누군지를 찾는 작업 말이야.”

“아….”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멀라이언과의 지난 대화 이후로 일어난 일은 세리와 서율에 관련된 일 밖에 없었다. 

나는 멀라이언에게 세리의 지갑에서 발견한 사진에 대한 내 마음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자네의 연인에게 의심을 하고 있단 말이지?”

“아뇨. 의심이라니…. 단지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솔직하지 못하군.”

회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잠시 먼 곳의 수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두 개의 달이 뜬 밤바다는 아름다웠다. 파도들이 밀려갔다가, 다시 밀려오며 쏴아-. 하고 시원한 소리를 냈다. 이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순 없었다.

“네…. 솔직히 의심이 듭니다. 세리와 저는 싱가포르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의 세리의 모습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세리도 저의 한국에서의 모습을 모르죠. 

우리는 처음 보는 타국에서 만났기 때문에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와 세리는 한국의 사람이고,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한국에…” 

나는 잠시 침을 삼켰다.

“세리의 ‘진짜’ 남자친구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더 솔직해져 봐.”

"…."

이번엔 눈을 꽉 감고 이야기했다.

“그 생각이 흐르고 흘러…. 언젠간 세리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을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주 잠깐. 서율을 떠올렸습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것이 사라진 것 같았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내 가슴을 다시 짓눌렀다. 죄책감과 후련함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되었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묘합니다. 복잡하네요.”

“그래. 서율은 왜 떠올렸나?”

“글쎄요….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미운 정도 정?”

“한국에 있는 속담입니다. ‘정’이라는 단어는 한국 특유의 감정을 이야기 합니다.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오래 보면 ‘정’이 쌓인다고들 하죠.”

“정말 묘한 단어군. 즉 미운 사람도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호의가 싹튼다. 이런 의미인가?”

“아닙니다. 호의라고 하기에는 묘한 감정이죠. 음…. 설명하기 힘든 개념이네요. 미운 사람이라면 여전히 밉겠죠. 하지만…. 상대가 보이지 않으면 또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죠.”

“과연.”

멀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해서 좋군. 지금 그 복잡한 자네의 마음에 눈을 절대 돌리지 말고 직시하게. 그 파동 하나, 그 물결 하나도 놓치지 말고 관찰하고, 느끼게. 그러다 보면….” 

커다란 회색 눈동자가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진실을 발견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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