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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4.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9-

약속 -2-

바다처럼 깊고, 선명한 꿈이었다. 꿈에서 깬 나는 깊은 숨을 뱉었다. 후으-. 누운 채로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멀라이언 조각을 발견했다.  

조각은 살짝 뒤틀려 있었다. 지난번에 비를 맞은 영향이 나타난 것 같았다. 웃는 얼굴이 뒤틀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도구 상자에서 헝겊을 꺼내 몇 번 문질러 보았지만, 역시나 효과가 없었다.  

마침 세리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종이쪽지도 없었다. 세리는 어디 간 것일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는 로비로 나가 세리를 찾았다.

“아, 그 손님이요? 아까 흰 피부에 큰 키를 하신 여성분이랑 어디로 가시던데요.”

매니저의 대답을 듣고 나는 인상을 구겼다. 

서율과 어디로 단 둘이 갔단 말이지…. 추측이 가는 곳이 있었다.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호텔 일 층에 위치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아. 그래서요. 언니. 그 놈이 그랬다니까요.”

“하여간.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야. 다 똑같다니까.”

서율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던 세리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왔어? 준호야?”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신나게 해?”

“그냥. 재밌는 이야기.”

세리가 히히-. 하고 웃는다. 그 웃음이 마치 못된 장난을 꾸미는 귀여운 임프를 닮았다. 나는 세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낮이 끝나고 저녁이 시작될 무렵. 세리는 자신이 노래하는 가게로 출근하기 전에 자신이 없는 동안 서율을 잘 돌봐주라는 당부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리가 카페를 나서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자리를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어디가?”

“방으로.”
 “세리 말 못 들었어?”

“들었어.”
 “안내 좀 한 번 해주는 게 그렇게 힘든가?”

“….”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율이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널 바라보는 게 힘들어.”

“도대체가. 아직도 그 과거에 얽매여 있는 거니?”

“과거가 아니야. 현재야.”

나는 말을 내뱉고 바로 후회했다. 현재라니. 나는 아직 서율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인가. 그 오래된 감정이 썩어서 악취가 나고 마음에 달라붙어 고름이 흘러내려도 아직 나는 서율을….

“그러니 날 좀 내버려 둬.”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빠르게 방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날처럼 문을 걸어 잠갔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아직 세리는 오지 않았다. 나는 위스키 한 병과 재떨이 하나, 담배 한 갑으로 하루를 보냈다. 술기운과 담배 연기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도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얼룩자국이 있다는 것을 오늘 서율을 보고 깨달았다. 세리의 노래가 듣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세리의 밤하늘의 별을 닮은 노래를 타고 하늘위로 올라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세리의 생명력 넘치는 살이 그립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심코 문고리를 잡다가 문 한 가운데에 있는 구멍에 눈을 갖다 대었다.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서율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다시 침대로 향했다.

똑-. 똑-. 똑-. 노크가 멈추질 않았다. 누군가 제지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노크를 할 심산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분노로 인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버린 나를 보고 서율이 무심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야.”

야? 나는 잠시 서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야?

“쪼잔한 놈아.”

“….”

서율이 잠시 비틀거리다가, 턱 하고 문을 잡았다.

“야. 들어간다.”

“어, 어….”

당황한 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서율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후우….”

내 쪽으로 불어온 서율의 숨에 어마어마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술도 좀 마셨고. 아무리 나라도 맨 정신에 못할 이야기가 있거든.” 

비틀거리던 서율이 침대에 널브러졌다.

“나는 이제야 알았어. 네가 떠나고 난 다음에 말이야. 난 너를 사랑했어.”

“아니. 그건 사랑이 아니야.”

“나는 다만 사랑을 그렇게 밖에 표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난 나만의 방식으로 널 사랑했어. 정말이야.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사랑했기에 널 옆에 두고 싶었고, 너에게 좋은 것을 주고 같이 나누고 싶었지. 그래서 나만이 생각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너에게 제의 했던 거야.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지. 

내가 지금껏 만난 남자들이 내게 가르쳐줬어. 그들에게 중요한건 돈과 여자였지. 마음이 아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너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이제야 알았다니 그거 실망인데.”

“미안해. 이제는 잘 할 수 있어. 그러니 내게 돌아올 순 없겠어? 네가 필요해.”

“넌 아직도 아무 것도 몰라.”

나는 팔짱을 끼고 문 앞에 버티고 서서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할 말이 끝났으면 어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멍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서율이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서율이 남기고 간 이해되지 않는 모순과 혼란이 내가 잠에 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세리가 올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세리는 가끔 출근하기 전에 발코니에 서서 노래 연습을 하곤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날갯짓을 연습하는 작고 귀여운 아기 새를 연상케 했다. 가끔 세리를 보고 박수를 쳐주는 관광객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세리는 손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내려가서 그들에게 자신이 일하는 바의 위치를 말해주고, 노래를 들으러오라는 홍보도 잊지 않았다. 가끔 세리 대신 내가 발코니를 나가면 몇 몇 관광객들은 세리가 언제 노래를 하러 나오는지를 묻는 경우도 있었다. 그 덕분에 발코니는 세리의 또 다른 공연장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오늘도 세리는 발코니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 층 카페에서 열 명 남짓 한 관광객들이 세리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뒤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세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기 새는 비록 첫 걸음을 땐지 얼마 안 된 풋내기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고 있었다. 언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영혼을 울릴 수 있는 멋진 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큰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을 세리와 관객석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상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상만으로 말문이 막히고, 미소가 나왔다. 힘내자. 세리야. 나도 힘낼 테니까.     

세리는 가게에서 일하고, 나는 싱가포르를 산책하며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일상이 반복 되었다. 나는 주로 점심쯤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했고, 해가 질 무렵에는 세리가 일어나 같이 식사를 하고 세리는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세리가 출근을 할 때 가게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지하철이 클락 키 역에 도착하면 세리는 자연스럽게

“안녕. 내일 보자.”

라고 인사를 건네고는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 빨리 가까워졌고, 서로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여유가 필요한 시점이다. 라고 생각을 했다. 세리가 출근을 하고 나면 나는 싱가포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이 보통의 일과였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여느 날처럼 지하철이 클락 키 역에 도착하자

“안녕 내일 보자.”

라고 인사를 건네고 인파속으로 사라지던 세리의 뒷모습을 보자 최근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던 생각이 마음까지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세리는 아름다웠고, 나는 예민했고,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한국이라는 우리가 나고 자란 치열하지만 아름다운 세계에 살던 우리는 언젠가는 그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였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잊으려 노력했다.

사실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는 가까웠고,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세리는 내가 자신의 일터까지 따라가는 것을 회피하는 것일까? 아니, 내가 따라가는 것을 회피한다는 것은 나의 망상이 아닐까? 사실은 내가 같이 가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내가 그녀의 영역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지하철 문이 닫힐 무렵. 나는 급하게 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후에, 문이 다시 열렸고 나는 천천히 역의 출구로 향했다.     

클락 키 역에 내린 나는 길거리 노점상에서 시원한 수박 주스를 하나 구입하고는 강가로 향했다. 시원한 밤바람이 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세리가 일하는 바를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가라앉았다가, 수면까지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향해 가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나는 호기심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세리의 모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가 곁에 있기 전의 세리의 모습이 궁금했다. 세리의 본연의 모습. 내가 보지 못한 달의 뒷면.

왜인지 모르게 두려움이 들었다. 세리는 밤하늘 같은 여자였다. 분명히 이 지상의 어떤 것 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는 그런 여자다.

그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가보자. 달의 뒷면을 보러. 나는 야쿤 카야 토스트 매장에 들려 세리에게 줄 토스트를 포장을 한 다음 세리가 일하는 곳으로 향했다.

바는 여전히 낡고 어두웠지만 활기가 넘쳤다. 옅은 노란색의 불빛이 따스하게 거리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색이다.

겹겹이 쌓인 인파를 뚫고 지나가자 세리가 들렸다. 그 후, 세리가 보였다.

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질끈 묶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 간결한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노래를 하는 세리의 모습이, 찬란한 그 빛이 관중들에게 쏟아졌다. 관중들은 세상의 근심을 잊고 세리의 노래를 받아들였다. 세리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 그들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저 먼 과거의 행복과 희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의 조용하지만 진정성이 담겨있는 박수가 세리에게 쏟아졌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박수를 쳤다. 훌륭해. 잘했어. 앞으로 더욱 더 훌륭한 노래들을 부를 수 있을 거야. 넌 할 수 있어.

세리는 무대를 정리 중 이었다. 마이크 선을 감는 세리의 갈색 손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아마 내가 왔는지는 꿈에도 모를 거야.  

나는 흥분과 설렘을 감추고 세리가 눈치를 못 채게 조금씩 다가갔다. 세리는 마이크 선을 낑낑거리고 감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이제 막 흩어지기 시작하는 인파를 뚫고 점점 세리에게 다가갔다.

세리가 서 있는 무대로 발을 올리려는 순간, 누군가의 팔이 나를 당겼다. 그다지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나는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 거렸다. 발꿈치에 토스트가 뭉개지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잠깐만요.”

인도인으로 보이는 다소 덩치가 있는 중년 남자가 피곤해 보이는 눈가를 하고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표정을 숨기고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죠?”
 “당신이야 말로 세리에게 무슨 일이죠?”

“음….”

나는 사실을 밝힐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다. …. 숨길 게 뭐 있어. 내가 세리의 남자인데.

“전 세리의 남자친구입니다. 세리를 만나러 왔어요.”

“남자친구?”
 내 티셔츠를 잡고 있는 굵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선가 찌직-. 하는 소리가 났다.

“세리는 남자친구가 없는데.”
 “…?”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당황한 나의 눈동자가 세리를 향했다. 하지만 세리는 무대를 정리하느라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당신.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세리에게 손 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 가게의 밥줄이라고. 저 친구 노래를 들으러 수많은 관광객들이 온단 말이야. 혹여나 허튼짓을 했다가는….”

잠시 망설이던 나는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남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세리는 의도적으로 나를 숨겼다. 그리고 이 남자의 반응을 보았을 때, 그 의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짓누르면서,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고는 뒤를 돌아 가게를 나왔다.      

나는 가게를 나와 강변을 따라 걸었다.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간이 되자 가게들이 불을 환하게 켜고 화려한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곳곳에서 다양한 언어들이 관광객들에게 날아들었고,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고 기름진 안주로 배를 채우며 테이블에 앉아 누군가와 함께 강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검은색의 강이 가게들이 내뿜는 형형색색의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문득 내 발꿈치에 뭉개지던 토스트의 감촉을 기억해냈다. 나는 그저 세리를 만나서 토스트를 전해주려고 한 것 뿐 인데. 지금은 혼자 이렇게 티셔츠 자락이 찢어진 채 쓸쓸히 강변을 걷고 있다. 

발걸음이 멈췄다. 더 이상 걷는 것이 무의미했다. 나는 강변에 깔린 잔디밭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아니 나의 사랑은 생각해 보면 아주 옅지 않았을까. 한 달 남짓한 싱가포르에서의 우리의 만남은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을까. 마치 칠월 칠석 하루가 모였다가 사라지는 오작교처럼 희미한 사랑은 아니었을까. 우리 관계에서 느껴지던 불안함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다니. 입 안이 텁텁해졌다.

아름답고 활기차고, 젊은 세리. 그녀의 주위에 남자들. 내가 세리에게 중요한 남자이긴 했을까? 만약 세리가 나를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로비에 위치한 의자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세리였다.

“준…. 준호야.”

세리를 마주치자 막상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리가 슬픈 눈으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세리가 가느다란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자 분노와 슬픔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기껏 입을 열었지만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왜 그랬어?”
 “그게….”

망설이던 세리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꺼냈다.

“그 가게 주인이 내가 여가수니까 남자친구가 없는 편이 사람들이 많이 올 것이라고 해서…. 그 아저씨 나쁜 사람은 아니야. 준호야. 나 가지고 온 돈 다 떨어져서 방황하고 있을 때 나 도와준 사람이야. 믿어줘. 준호야. 널 속이려고 한 건 아니야….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는데….”

세리가 꺼낼 말을 신중하게 고르느라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에 나의 입이 움직였다.

“언젠가? 그게 언젠데?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나도 마찬가지로 널 도와주려고 노력했어. 근데 왜 나한테는 이야기 하지 않았던 거야? 속인 거잖아. 게다가 나 며칠 전에 너 취했을 때, 그때 옷 갈아 입혀주면서 너 지갑 우연히 봤는데…. 거기 너랑 다른 남자랑 찍은 사진이 있더라. 왜 말 안했어? 거짓말쟁이. ” 

‘거짓말쟁이’라는 날카로운 단어가 세리에게 날아가 그녀의 가슴을 관통한다. 고통스러운 표정의 세리가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자그마한 입술을 우물거린다.

“아. 아냐…. 정말로 말하려고 했단 말이야…. 나 거짓말쟁이 아니야. 준호야.”

나는 세리에게 등을 돌리고 분노가 가득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가지 마. 바보야. 가지 말고 안아줘.’

또렷하게 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기의 진동을 타지 않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소리가. 하지만 곧 타오르기 시작한 분노가 그 목소리를 지워내고, 나의 발걸음을 앞으로. 앞으로. 점점 세리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정말로 말하려고 했단 말이야!”

세리가 있는 힘을 다해 지르는 소리가 내 등으로 전해져 왔다. 어깨 너머로 살짝 뒤를 돌아보자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세리가 보였다. 뭘 잘 했다고 우는 건지.

싱가포르의 열기가 분노를 부추기고 이성을 녹였다. 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흐르는 땀마저도 짜증이 났고 무언가 내게 중요한 것을 부셔버리고 싶었다. 

밉다. 정말로 밉다. 세리도 서율과 같았던 것이다. 거짓말쟁이였다. 나를 속이고 나의 뒤에서 몰래 무언가를 숨겼다. 자신을 위해서. 나는 그녀에게 내 진심을 주었는데. 빛나는 그것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희귀하고 소중한 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다른 것을 쥐기 위해 차갑고 더러운 바닥에 버렸다. 그럼으로써 내가 상처받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아니. 알았겠지. 알면서도 그랬겠지. 제기랄.  

어느 정도 걸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불빛들. 나는 클락 키에 와 있었다. 어째서 이곳으로 다시 온 것 일까? 나는 문득 시선을 내려 신고 있던 버캔스탁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들어보니 낯익은 카페가 눈에 보였다.

세리와 내가 하루의 계획을 세우던 카페였다. 영업이 끝난 카페의 마루 한 쪽에 낡고 반들반들한 테이블과 네모지게 각진 철제 의자가 다소곳이 모여 있었다.

그래. 나는 이 버캔스탁을 신고 막 더워지기 시작한 하루의 시작을 세리와 함께 했지. 세리의 색깔로 채워지던 하루. 그녀의 재잘거리는 목소리. 아직은 조금 부끄러움을 타는 다소 홍조를 띈 얼굴. 따뜻하고 힘이 약동하는 그녀의 구릿빛 피부. 상큼한 향기가 머무는 그녀의 머리칼….

처음 그녀와 내가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그래. 나는 길거리의 여자를 피해 세리가 있는 가게로 도망쳤고 그녀가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줬어. 그래. 날 먼저 믿어 준거야. 날 믿어줬다고. 서율의 냉기가 남아있는 그 차가운 세계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 줬었어. 그런데 나는…?

나는 정신없이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걷던 나는 곧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세리에게. 나의 인생을 다시금 아름다운 색깔로 색칠 해 준 세리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믿기로 했잖아. 왜 바보같이 조금 더 믿지 못한 걸까.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안 돼. 세리를 잃을 순 없어. 기다려줘. 세리야.

호텔 입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있는 힘을 다해 그곳을 향해 뛰었다.

프런트에 들어서자 프런트에 서 있던 직원이 나를 바라보고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아까 당신이 나간 후에 그 친구가 이 로비에서 펑펑 울었어요. 사람이 그렇게 우는 것은 참 오래간만에 봤어요. 한참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당신을 찾으러 간 것 같았는데….” 

나는 직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 오는 길에 세리를 마주치지는 못했다. 세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밤을 새우며 싱가포르 세리가 가봤을 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결국 세리를 찾지 못했다.

절망이 엄습했다. 그동안 받은 상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었다. 세리의 손을 잡고 더운 열기로 가득한 이 나라의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서율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의심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피곤한 눈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방 문 앞에 서자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세리가 없는 방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고 한참이나 망설이던 나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내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혹시, 혹시….

나는 조심스럽게 이불에 다가갔다. 흰색의 솜 덩어리 아래서 자그마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불의 끝을 살짝 잡고 들어 올리자 그 안에는 세리가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느낀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뺨에 채 마르지 않아 검은 강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중얼 거렸다.

“미안해…. 세리야. 미안해.”     

참나무 장작이 타닥-. 타닥-. 소리를 냈다. 나는 장작 몇 개를 난로에 더 던져놓고 손을 녹였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나는 그저 먹고, 자고, 기억하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기억은 차가웠고, 오래 만질수록 아팠다. 그 자그마한 결정들을 어루만지며 나는 울었다. 차오른 울음도 얼음이 되었다.

똑-. 똑-. 누군가가 내 공방에 노크를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반 쯤 얼은 손을 움직여 문을 열었다.

“여어.”

멀라이언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안녕하신가. 이곳이 자네의 껍질인가 보군.”

“네. 들어오시죠.”

“그럼. 실례.”

거대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멀라이언이 큰 눈동자를 굴려 내 공방을 훑었다.

“멋지군.”

“감사합니다.”

멀라이언은 슬금슬금 움직여 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난로 앞에 엎드린 멀라이언이 따뜻한 열기가 기분 좋은 듯 눈을 슬며시 감았다.

“여긴 무슨 일로…?”

“자네에게 중대한 사실을 알려 주려 왔네. 곧 폭풍우가 올 거야.”

나는 고개를 틀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번개가 대지를 흔들고, 빗방울과 눈들이 휘몰아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멀라이언은…. 폭풍우를 느낄 수 있다네. 파괴와 혼돈이 다가오고 있어. 거대한 폭풍우는 모든 것을 휩쓸지. 지상, 바다, 하늘 가릴 것 없이 말이야. 폭풍우를 막을 수 있는 건 우리 멀라이언 뿐이야. 그것도 한 번 막고 나서는 긴 시간동안 휴식을 취해야 하지. 하지만 인간은 폭풍우를 막을 수 없네. 작고, 나약하지. 그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쓰러지는 수밖에 없어. 폭풍우가 지나간 후,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네.

한 부류는 그저 쓰러져서 땅만 바라보는 인간들이야. 그들은 무엇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지. 손에서 모래 하나 흘려보지 않은 자들.

그들은 다시 일어서지 않아. 땅에 묻혀 무덤으로써 살아가지.

다른 부류. 그들은 생존하려 하지. 살려고 발버둥을 쳐. 무엇이든 붙잡고, 울면서 악쓰고, 뛰어다니지. 숭고한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이루어내. 설령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을 안다 하더라도.”

멀라이언이 눈동자를 굴려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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