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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5.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0-

약속 -3-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서먹해졌다. 우리 둘 다 평소처럼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했지만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세리는 자주 내 눈치를 살폈고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워 세리에게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같이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짐에 따라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져갔다. 

세리는 더 이상 발코니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일을 끝내고 와서 자고 있는 나에게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우린 분명 서로에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우리는 손이 닿으면 녹아버릴 첫눈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혹여나 내가 가진 온기가 상대에게 전해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까. 걱정에 가득 찬 몸짓들. 

오늘도 세리는 나의 눈치를 살피다가 해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정오에 방을 나섰다. 나는 세리를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세리는 요즘 저녁이 아닌 점심에 방을 나가는 경우가 잦았다. 싱가포르의 강한 햇볕에 타들어갈 세리의 피부와 마음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파왔다. 나는 우리 사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나의 실수를 돌려 보기로 했다.     

부기스 스트레스는 약 수 백의 상점이 운집해 있는 초대형 시장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동대문 시장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곳은 낮에는 주로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이나 패션, 음반, 책은 물론 현지인들을 위한 식자재 등 거의 모든 카테고리의 물건들이 위치해 있었지만, 밤에는 음식과 술을 파는 조그마한 손수레가 돌아다니는 야시장의 면모도 보여주는 곳이었다. 

나는 지하철 역 출구에서 산 수박 주스를 들고 시장 입구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이 곳이라면 적당한 재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시장 내부로 들어서자 엄청난 인파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나는 내 의지로 이동하기보다는, 거의 인파에 밀려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옷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들 그리고 현지인들을 위한 식자재 마트 등을 곁눈질하면서 구경을 하고 있자니 나는 어느새 시장의 끄트머리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두껍고 넓은 보자기 위에 보석과 원석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머리에 알록달록한 두건을 쓴 노파와 눈이 마주쳤다. 언뜻 보기에 환갑을 넘어 보이는 나이에도 눈빛이 마치 아이처럼 순수했다. 눈이 마주치자 노파는 한쪽이 없는 앞니를 씩 드러내며 웃고는 내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 손짓이 정겨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낮추어 보자기 위에 놓인 보석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상태가 괜찮은 것들이었다. 형형색색의 보석들을 보며 세리에게 어울릴 것이 무엇일까…. 하고 고민을 거듭하던 중 노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있었다.

“흑수정. 항상 나쁜 기운으로부터 지켜줘.”

자연석 특유의 제멋대로의 형태를 지닌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의 크기의 흑수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노파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수정을 들어서 햇빛에 비춰보았다. 햇빛을 받은 수정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까맣게 빛나며 점점이 박혀있는 은색의 조각들이 마치 밤하늘을 날고 있는 세리의 음표를 보는 듯했다. 결정들은 서로를 맞잡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의식으로 벼락이 내리쳤다. 순식간에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디자인이 떠올랐고, 어떤 재료를 써야 하는가. 각각의 디자인이 지니는 의미. 

머릿속의 디자인이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노파에게 값을 지불하고 흑수정을 샀다. 노파는 내게 행운을 빌어준다며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양손을 합장한 그 경건한 모습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흑수정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가방을 열어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스케치를 시작했다.

‘연리지’로부터 영감을 받은 나무처럼 보이게 세공할 구리 재질의 연결고리와 타이트하고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세리의 취향을 반영한 금 재질의 마름모의 몸체. 몸체의 외부 선을 둘러싼 자그마한 멀라이언 천사들이 나팔을 부는 각인. 그리고 몸체 가운데에 세리의 상징인 음표를 새겨 넣고, 그 마름모꼴의 모양에 맞게 흑수정을 가공하여 끼워 맞춘다.

한 시간에 걸친 스케치가 끝났다. 나는 스케치를 마친 종이를 스케치북에서 뜯어내어 벽에다가 고정해놓고, 한동안 디자인을 검토했다. 가능하다. 

나는 이 작품에 이름으로 ‘밤하늘’을 지어주었다. 

스케치를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고, 방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던 캐리어를 열어 제일 안쪽에 들어있는 검은색 가죽 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열자 한국에서 가져온 가지각색의 모양의 작업 도구들이 보였다.

세리의 밝은 미소. 음식을 먹는데 열중하는 세리. 아침에 내 손을 맞잡은 세리의 따뜻한 온기. 세리의 탄력적인 갈색 피부. 세리의 젖은 머릿결….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난 후. 나는 작업 도구를 손에 쥐었다.

묵직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따스했다. 나는 그날 물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세리를 떠올리며 작업을 시작했다.

연결고리 부분은 이미 옛날에 ‘연리지’ 제작 과정에서 남은 부분이 있었기에 조금만 손을 보았고, 얇은 금판에 자그맣게 멀라이언 천사들을 조각하는 부분이 매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가공이 힘든 건 흑수정이었다. 

흑수정을 얇게 도려내고, 깎아내고, 다듬었다. 흑수정은 수많은 원석 중에서도 가공하기 힘든 축에 속하는 원석이었다. 조금만 날을 세게 밀어도 그 아름다운 결이 전체적으로 부서져버렸다. 게다가 경도는 얼마나 높은지 날에 힘이 조금만 부족해도 표면만 깎여나가 반짝이는 표면이 금방 거무튀튀해졌다.

오랜만에 하는 작업은 더디고 힘들었다. 과도하게 긴장된 신경과 굼뜨고 정확하지 않은 손은 흑수정을 자주 다치게 했다. 나는 수시로 방을 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신경이 얼마나 긴장되었는지 전신에 퍼진 혈관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작업 첫 번째 날을 매우 불만족스럽게 마무리 짓고는 작업 도구들과 재료, 그리고 스케치를 천으로 잘 감싸서 세리가 발견할 수 없게끔 침대 밑으로 숨겼다.

작업을 마치는 시간은 일주일이 소요되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름모의 형태로 연마된 흑수정은 밤하늘의 형태를 갖추었다. 나는 가공된 흑수정을 미리 준비해 놓았던 몸체에다 맞춰 보았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흑수정이 목걸이 틀에 알맞게 들어갔다.

스케치와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아니, 예상보다 더 멋진 작품이 나왔다. 나는 완성된 ‘밤하늘’을 한동안 바라다보면서, 세리의 귀에 매달려 있는 ‘밤하늘’을 상상해보았다. 왠지 나도 모르게 볼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세리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완성된 ‘밤하늘’을 황도 십이궁이 새겨진 흑단나무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넣고, 동봉할 짤막한 편지를 썼다. 

‘싱가포르의 열정적이고 화려한 밤하늘 같은 너에게.’

이제 세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문득 방에 걸린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시계를 보니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작업이 끝난 해방감을 위스키로 만끽하며 세리를 기다렸다. 

‘밤하늘’을 만드는 작업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나는 다시금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세리에게 그 작품의 영감을 얻고 그 영감을 고심을 거듭해 디자인하고, 부기스 스트리스에서 재료를 구하여 가공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뛰어난 집중력, 끈기와 창의성 등 다양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노력을 기울여서 좋은 결과를 얻는 기쁨은 어느 다른 기쁨과 비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작품을 받고 기뻐할 세리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게 ‘기쁨’으로 가득 찬 세리의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마음속이 따스해지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위스키를 반 병정도 비웠을 때, 저 멀리서 아침 해가 뜨는 것이 보였다. 아마 잠시 후면 세리가 돌아올 것이다. 나는 작업 도구를 갈무리한 가방과 세리에게 줄 편지와 ‘밤하늘’이 담긴 케이스를 천장에 숨기고 세리를 기다렸다.

세리는 자신이 한국에서 가져온 운동화를 자주 신었다. 하얀색의 그 운동화가 호텔의 복도에 깔린 고풍스러운 갈색 양탄자를 밟으면 폭-. 폭-. 하는 귀여운 소리가 나곤 했는데, 마지막 위스키를 비우기 위해 슬라이스 한 레몬을 잔에 넣으려고 늘어져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그토록 기다리던 그 소리가 들렸다.

폭-. 폭-. 자그마한 세리의 운동화가 양탄자를 밟으며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고개를 숙인 채로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내밀고 있는 세리가 보였다.

“어?”

당황한 세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좌우로 흔들린다. 꽤 당황한 것 같았다.

“아직 안 잤어?”
 “응. 뭣 좀 하느라.”

“아…. 그렇구나.”

나는 손을 뻗어 안절부절못하는 세리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어서 와.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세리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세리를 먼저 의자에 앉혀놓고, 나는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다.

부족한 용기를 북돋기 위해 마지막 위스키를 한 번에 비웠다. 아…. 나는 손을 마주 잡고 세리를 바라보았다.  

“세리야.”

“으…응?”
 “미안해.”

“응?”

“지난번에 그 있잖아…. 그 가게에서….”

“아. 그거.”

세리의 시선이 땅 밑으로 깔린다. 그 모습이 마치 땅 속으로 사라진 전설 속의 요정 같아서,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다시 한번 세리의 손을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세리는 세리의 사정이 있는 건데, 나는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하고….”

“아니야. 나도 잘못했어…. 준호에게 먼저 말을 했어야 하는데. 그게 준호에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어. 미안해…. 사실 나는 그날 이후로 준호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말도 잘 안안하고. 늘 나를 안아주고 내게 먼저 손 내밀어줬는데…. 그날 이후로 그런 준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근데 준호야. 나 진짜 거짓말쟁이 아니야…. 내 마음 오해 말았으면 좋겠어….”

“응. 세리는 거짓말쟁이 아니야. 미안해. 세리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나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세리를 바라보았다. 세리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고개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세리와 시선을 맞추던 나는 몸을 숙여 세리를 껴안았다. 낮아진 내 어깨에 세리가 머리를 기대 왔다. 자그맣고 가벼웠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서로의 가슴이, 숨결이, 마음이 맞닿았다. 하나. 될 수 있을 만큼의 하나. 가능한 만큼의 하나. 서로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주고 믿음을 주었다. 나는 손을 뻗어 천천히 세리의 얼굴을 더듬어 입술을 찾았다. 작고 귀여운 세리의 입술이 나의 엄지손가락에 닿았다. 손가락을 떼고 눈을 감은 채 세리의 입술에 키스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부드럽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좋아. 준비가 되었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 쉬었다. 큰일을 하기 전에 늘 하는 습관이었다. 나는 세리의 손을 이끌어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혔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선물?”

“응. 잠깐 눈 좀 감아볼래?”

“응. 알았어.”

세리가 눈을 감고 미소를 짓는다. 저 따스한 미소가 좋다. 언제까지고 저 미소의 곁에 남아있고 싶다. 미래를. 행복을 꿈꾸게 하는 미소다.

“흐응. 알았어.”

나는 천장에서 ‘밤하늘’이 담긴 상자를 꺼내 세리의 눈앞에 들었다. 

“자. 이제 눈떠봐.”

세리의 실눈이 조금씩 커진다. 이윽고, 믿기지 않는 듯 커진 두 눈이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세리의 표정이 무표정하다. 겁이 조금 났다.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걸까?

“열어봐.”

세리가 손을 뻗어 상자를 잡았다. 상자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세리가 상자를 열자 흰 천에 싸여있는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작품명은 ‘밤하늘’이야.”

나는 ‘밤하늘’을 들어 조심스럽게 세리의 목에 걸어 주었다. 흑수정이 세리의 구릿빛 피부 사이에 내려앉았다.

“세리가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어. 너는 마치 열기가 가득한 이 나라의 밤하늘을 닮았다고 생각이 들었거든. 무대에서 이 목걸이를 하면 더 멋질 거야.”

설명을 늘어놓는 내게 세리가 가볍게 안겨왔다. 따뜻한 품이다.

“고마워. 준호야. 너무 예뻐!”

한참 눈을 감고 안겨있던 세리가 고개를 들고 내게 말했다.

“그럼. 나도 준호에게 오늘 특별한 선물을 해 줄게.”      

세리가 나의 손을 이끌고 향한 곳은 인근에 위치한 대형 마트였다. 세리는 식품 코너에서 소고기, 대게, 파슬리, 후추 등을 들었다 놨다 하며 가격표들을 둘러보고, 물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약간은 어설프지만, 제법 주부처럼 보이는 모습에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흠-. 흠-. 흠-.”

세리가 진열대에서 앞치마를 꺼내고는 자신의 목에 둘렀고, 알록달록한 꽃무늬 앞치마를 입고 빙그르르 도는 세리의 모습에 절로 행복한 웃음이 나왔다. 

“어때. 어울려?”

“응. 잘 어울리네.”

세리의 얼굴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다가온 세리의 입술에 키스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객실에 취사도구가 없음을 기억해 내고는, 일 층의 광장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 덕분에 레스토랑은 한창 영업 준비 중이었다. 나는 총주방장으로 보이는 백발의 백인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만들어 온 공예품을 내밀며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고, 잠시 취사도구를 빌릴 수 있는 지를 물어보았다.

“흐음….”

나무로 깎아낸 하회탈 조각을 바라보던 총주방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멋진 선물을 받아서야. 자. 저쪽에 있는 도구를 쓰시오. 다만 조심해서 다뤄주기를 바라네. 자네도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의 작품을 존중할 줄은 알겠지만.”

나는 감사를 표하고, 세리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고, 고개를 끄덕인 세리가 마트에서 장을 본 재료들로 소고기 스테이크와, 연어 샐러드, 칠리 크랩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가 진행되는 동안에 총주방장과 다른 주방장들이 왔다 갔다 하며 세리의 음식을 도와주는 모습과 그들의 조언을 받아 열심히 요리를 하는 세리를 보는 것은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던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밝은 아침 햇살이 비추는 열대 식물이 가득한 일 층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레스토랑과 그 사이에서 조리에 한창인 세리.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요리를 지켜보는 주방장들과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총 주방장.

그림이 완성될 때쯤, 레스토랑 쪽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세리가 완성된 요리들을 그릇에 옮겨 담고 있었다. 세리는 감사의 답례로 조그마한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덜어 주방장들에게 건넸다. 조심스럽고 진지한 표정으로 세리의 요리를 맛본 주방장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는 그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가져왔다. 주방장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다시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먼저 스테이크를 맛보기로 했다. 포크로 고기를 고정시키고, 나이프로 한 조각을 떼어내자 세리가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반쯤 장난을 담아 심각한 표정으로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 정말 맛있는데?”

“에이. 거짓말.”

“아냐. 진짜로 맛있어.”

“정… 정말?”

“응. 진짜라니까.”

표정이 밝아진 세리가 양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짝-. 짝-. 작은 박수 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나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더 썰어 세리의 입에 넣어주었다. 맛을 본 세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티 하나 없이 순수한 웃음이다. 
 “세리야.”
 “응?”
 “사랑해.”

세리의 볼이 붉어진다. 세리의 시선이 접시에 집중되고, 당황한 손가락이 붉은 칠리 크랩 한 조각을 집는다. 

“뭐야. 갑자기….”

“그냥.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너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행복해져.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더 행복해지게 돼.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게 되면. 자꾸만 가슴이 벅차올라서 그 말을 참을 수가 없어. 사랑해. 세리야.”

“으, 응….”

세리가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그녀의 볼에 까만색의 스테이크 소스가 묻어 있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뻗어 그 자그맣고 귀여운 소스 자국을 닦아주었다.

“응…. 나도 사랑해. 준호야. 나도 매일 준호한테 이렇게 맛있는 음식 해주면서 살고 싶어.”

식사를 마치고, 나는 설거지를 자청했다. 영업 준비를 끝낸 주방장들이 접시들을 들고 들어선 나를 보고 크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갔다.

세리는 아까 전에 마트에서 산 꽃무늬 치마를 내게 둘러주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 너무 귀엽다. 킥킥킥….”

내가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세리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나는 뒤로 돌아서 세리에게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해 보였다. 세리의 웃음이 절정에 달한 것이 너무나도 귀여워, 나는 지금 세상이 멈췄으면. 하고 잠시 바라보았다.

정리를 다 마친 우리는 다음에 꼭 한 번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기로 총주방장과 약속을 하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팔을 뻗어 세리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흐음….”

세리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작은 머리. 그 머리의 끝으로부터 시작되는 윤기 나고 곧은 머리칼은 귀 밑에서 끝난다. 눈썹은 다소 흐리게 눈 끝으로 전진해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썹에 살짝 손을 얹는다. 그녀의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내 손가락을 향하고, 그녀의 손가락이 나의 손위에 얹힌다.

우리의 손가락이 얽히고, 나의 눈동자와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서로 인사를 건네고, 서로의 눈 속에 빠져든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깊게 파여 있는 상처의 나이테를 본다. 나의 눈동자가 상처받은 어린 짐승을 닮은 그 상처를 어루만진다. 괜찮아. 세리야.

“….”

안식처를 찾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안도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나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아주 가볍게. 마치 깃털을 만지는 수준의 부드러움으로 세리의 눈가를 훔친다. 조용히 솟아나는 그녀의 눈물이 내 손가락을 타고 내 손목으로 흐른다. 그 서늘함이 내 마음속을 촉촉이 적신다. 그녀가 위로 받음으로 나도 위로받는다.

눈물을 충분히 흘린 세리가 입을 연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아주 조용히 경청한다.

“가끔…. 너무 무서워. 너무나 행복해서. 행복해서 무서워.”

“괜찮아….”

나는 오른손을 뻗어 세리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신다. 

“괜찮아. 세리야.”

“언젠가는 이 행복이 끝나 버릴까 무서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 버린 후로…. 준호와 함께 숨 쉬는 순간도, 준호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 순간도, 준호의 따듯한 손, 그리고 준호와 함께 보낸 밤…. 아름다운 별들. 뜨거운 싱가포르의 태양….”

“괜찮아.”

나는 몇 번이고 진심을 담아 세리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세리야. 나는 언제까지나 너의 옆에 있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싱가포르의 해가 지금보다 약 오십 도는 더 뜨거워져 이 알록달록한 건물들을 초콜릿처럼 녹여버려도. 어느 날 갑자기 싱가포르의 모든 야쿤 카야 토스트가 사라져 버려도. 더 이상 점보에서 칠리 크랩을 팔지 않아도. 주롱 새 공원에 더 이상 새들이 노래하지 않아도. 더 이상 멀라이언이 싱가포르를 지켜주지 않더라도.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거야. 약속해.”

“정말?”
 세리가 큰 눈망울에 약간의 눈물을 담고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신뢰가 가득 담긴 굳은 턱을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다행이야. 여기서 준호를 만나서. 준호가 날 사랑해주어서….”

세리가 내 뺨에 볼을 비빈다. 나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주고 머리를 품에 안아주었다. 세리의 자그마한 머리가 가슴으로 파고든다.

“준호야….”

“응?”

“나 있잖아. 한국에서 남자 친구가 있었어.”

“‘있었던’ 거지?”

나를 슬픈 눈으로 응시하는 세리의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다. 아주 잠시 망설이는 세리. 그러나 곧 입술을 굳게 다물고 대답한다.

“응.”
 “미안.”

고개를 다시 파묻으며 대답한다.

“아니야. 내가 말한 건데. 뭐.”

쑥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른 세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하여튼 남자 친구가 있었어. 꽤 오래 만났지.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이사하게 된 동네에서 알게 된 애였는데….”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이야기 들이다. 지금 세리는 용기를 내서 내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말을 참 잘 들어주는 친구였어. 어쩌다가 내가 중학교 때 장기자랑에서 노래를 하게 됐는데. 친구들이 나를 보고 환호해 주는 그 짜릿한 광경을 보고는, 그때 처음으로 가수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부모님한테 그 이야기를 했다가 집안이 난리가 났었지. 부모님들이 좀 고지식하거든. 어휴…. 집 생각하니까 또 가슴이 막 답답하고 그러네. 그렇게 집안에서 난리를 치고 도망 나오다가 걔랑 마주쳤는데. 걔한테 또 그 이야기를 한 거야. 가수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왠지 가슴이 막 설레는 거야. 얘는 믿어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모습에 반해서 사귀기로 한 거야. 근데 걔가 딱-. 하고 내 뒤통수를 친 거지. 그 친구가 가자고 한 술집에서 노래를 한 번 불렀는데. 거기서 내 실력을 알아보고 나한테 가게에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 거야. 근데 노래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점점 학점이 떨어지고…. 학사경고까지 맞게 됐어. 근데 별로 신경 안 썼다? 어차피 자퇴나 할까 생각 중이었거든. 근데 걔가 세상에. 아빠한테 그 이야기를 한 거야. 내가 노래 부르는 일을 하느라 공부를 안 한다고. 와. 그때 기분이란 정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세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리의 말을 들어주고 꼭 껴안아주는 것 밖에 없었다. 석양이 질 때까지. 나는 세리를 깊게 안아주었다.           

세리에게 ‘밤하늘’을 선물 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세리는 밖을 나갈 때마다 ‘밤하늘’을 차고 나갔는데, 그것은 내게 다시없을 기쁨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만든 장신구를 차고 있다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나는 ‘밤하늘’과 세리를 보면서 자주 미소를 지었다. 혹여나 세리를 아는 사람들이 세리가 차고 있는 ‘밤하늘’에 대해 칭찬을 하면

“이 아이의 이름은 ‘밤하늘’이에요. 여기 있는 내 남자 친구가 만든 작품이고요. 어때요. 대단하지 않아요?”

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세리의 입을 손으로 막으려 했고, 사람들은 세리의 입을 막으려 애쓰는 나를 피하는 세리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세리가 내게 상처를 털어놓은 날은 마치 숲을 거닐다가 처음 발견한 이름 모를 신비로운 씨앗 같았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자 나는 내가 해야 될 행동을 알았다.

나는 우리가 살아야 할 건물들과 이민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상세한 정보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았다. 싱가포르 인들의 영어는 말레이시아어와 중국어가 다소 섞여 있어 알아듣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나는 핸드폰에 깔려 있는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그들이 건네준 서류를 읽어보고 검토했다.

싱가포르의 땅과 건물은 한국보다 훨씬 비쌌고, 영주권자가 아닌 이상 사업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알아볼 것이 많았고, 많은 돈이 필요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고 좋은 건물을 찾아 하루에도 몇 번이고 호텔을 나섰다.

현실은 명확했으나 꿈은 안개처럼 흐릿한 것이어서, 나는 그 안에 갇혀 헤매는 경우가 많아졌다. 세리는 하늘과 맞닿을 정도의 풍부한 감정과 영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감은 거의 없는 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우리가 가진 돈의 수치와 가치를. 그것들이 얼마나 덧없이 사라질 수 있는지를. 그것이 없을 때의 비참함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발품을 열심히 판 덕분에, 제법 마음에 드는 건물을 발견했다. 리틀 인디아 역 근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이었다. 오랫동안 여러 가게들이 들어왔다 나간 터라 건물 곳곳이 더러웠고 온갖 냄새들이 건물 곳곳에 배어 있었지만 가격에 비해 건물이 넓었고, 전망이 좋은 장점이 있었다. 아마 이곳을 매입하게 된다면 유지 보수에 손이 많이 갈 것이 분명했지만, 다른 건물에 비해서 가격이 매우 저렴한 편이었다. 마음에 들었지만, 더 많은 곳을 보고. 세리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했다. 나는 중개업자의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를 받고,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우리는 꿈을 꾸는 ‘인간’으로써, 먹고사는 사명을 달고 살아야 했다. 아무리 꿈에 가까이 다가가도 우리는 ‘인간’인 탓에 욕망은 늘 우리의 곁에서 실재했으며, 그 덕에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고,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서 쉬고 싶었다. 가끔 많은 돈을 들여 외식을 하고 싶었으며 언젠가는 태어날 우리의 아기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 ‘좋은 것’들은 많은 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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