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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7.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1-

약속 -4-

호텔로 돌아오자 그동안 현실에서 조금 떠 있는 나의 마음이, 다시 현실로 착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온갖 서류들을 밀어 놓은 채 인터넷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지출되어 있었다. 래플즈 호텔에서 생각보다 오래 묵은 탓이었다. 래플즈 호텔은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좋은 곳이었지만, 가격이 아주 비싼 최고급 호텔에 속했기 때문에 금액마저도 상당히 비싼 축에 속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게 가진 것은 어느새 한 줌 밖에 없었고,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될 것은 많았다. 기쁨은 저 먼 하늘로 자취를 감추었고, 나의 마음속에는 근심과 걱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어려운 영어 단어들과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민 절차와 사업 절차들. 점점 줄어만 가는 통장 잔고들이 어지러이 내 시야를 채웠다.

어느새 깊은 밤이 지나가고 고요한 새벽이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나는 서류들을 정리해서 책상에 집어넣고 곧 돌아올 세리를 위해서 방을 간단히 정리하고,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어렴풋이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문고리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고, 세리의 따뜻한 몸이 내게 안겨온다. 맞닿은 세리의 피부가 곤두서 있다. 나는 손을 뻗어 세리를 어루만졌다.

“아직 안 잤어?”
 세리가 나의 품을 파고든다. 가슴팍이 촉촉이 젖어온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다. 놀란 나는 스위치를 켜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세리의 저지에 다시 침대에 누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잠시 후에, 그녀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 형태는 마치 달팽이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행위를 닮아 있었다. 오늘 세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받은 상처가 전해져 왔다. 거친 세상의 풍파가 그녀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런 그녀에게 현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그녀의 상처를 더욱더 벌어지게 할 뿐일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해 주는 대신에, 그녀를 더욱더 세게 안아 주었다. 지금 세리에게는 단지 따뜻함. 그녀의 지친 몸을 달래줄 따뜻함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나는 낮에 봐 두었던 건물을 생각하며 세리를 안아주었다.

우리가 래플즈 호텔에서 같이 지내기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아주 가까이 붙어있었고, 덕분에 서로의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낮에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싱가포르의 태양은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 지치지 않는 열기로 인해 나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들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수많은 면을 가진 다각 면체였다. ‘직업, 연봉, 이름, 나이, 아는 사람, 사는 곳….’ 등의 나를 하나의 거대한 조형물로써 존재할 수 있게 나를 지상으로부터 받쳐주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나는 하나의 '원석'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이 없어도 내가 온전한 하나의 ‘사람’으로 써 존재할 수 있음을 이 먼 타지에서 깨달았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싱가포르의 길가에서 나에게 붙어있던 '그것'들을 뜨거운 열기로 녹여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차가운 물로 ‘그것’들을 씻어내는 행위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다. 제련을 닮은 그 행위로 인하여 나는 좀 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세상의 어떤 '본질'적인 것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여행으로 피곤해져도 래플즈 호텔의 훌륭한 시설과 품질 좋은 음식들, 그리고 직원들의 더욱더 훌륭한 서비스를 받다 보면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다음날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곤 했다.

반대로 세리는 밤에 활동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녀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밤이면 그 속에서 멋지게 빛나는 법을 알았고, 자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친밀하게 구는 것이 나의 질투를 불렀지만 세리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용히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고, 담배를 즐겨 피웠으며 독하고 향이 깊은 위스키를 좋아했다. 검은색과 흰색의 옷을 매치해서 입는 것을 좋아했으며 잘 때는 꼭 사방이 조용해야 잠이 들었고,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 누군가가 시비를 걸거나 기분을 언짢게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세리는 처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내게서 나는 담배 냄새를 지독히도 싫어해서 하루에 한 번은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에 대해서 꼭 짜증을 냈으며(그러나 내게 담배를 끊으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그냥 짜증이 난다’는 것이었다), 술을 한 번 마시면 꼭 술주정을 할 때까지 마셨다. 자신의 몸매를 드러낼 수 있는 타이트한 옷을 입고 그로 인해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고, 자신이 다녔던 대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서로의 공통점이 거의 없었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의 입장을 조금씩 내세우기 시작했다. 세리는 점점 나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졌다. 물론 나는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늘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체력과 재력, 감정은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고, 나의 욕심은 그것들보다 더 컸기 때문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내가 보여주는 마음은 명확한 격차가 있었다. 그 격차가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면 세리는 내게 

“준호의 마음이 식었어.” 

라며 섭섭함을 표시했다. 

그때마다 나는 세리에게 

“아니야. 내 마음이 식은 게 아니야. 단지 나는 조금 지쳤을 뿐이야.”

라고 이야기해보았지만, 세리는 도통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세리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는 것은 내게 다시없을 고통이어서, 나는 피로한 몸을 재우지 않고 세리의 투정을 들어주고, 세리가 잠에 들면 다시 건물을 알아보러 호텔을 나서는 경우가 잦았다.

나는 나대로 세리에게 내 마음을 앞세웠다. 나는 가끔 세리에게 가게로 놀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세리는 아직도 거부를 하였고 그런 모습이 나는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세리는 가게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기분이 다소 언짢은 것 같았는데, 그것 도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 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뭔가 확실히 세리의 입장과 나의 입장이 점점 서로에게 벗어난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세리와 나의 마음속 톱니바퀴가 점점 어긋나며 쌓이는 불안의 톱밥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세리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을 뒤로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의 고심 끝에, 나는 지난번에 봐 두었던 리틀 인디아 부근의 낡은 건물이 제일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리틀 인디아에는 싱가포르에서 손꼽히는 규모와 다양성을 지닌 부기스 스트리스가 있었고, 그곳에서 파는 기념품을 사러 오는 관광객과 생필품을 구입하러 오는 현지인들이 제법 많았다. 교통이 약간 불편한 점과 과도한 인구밀집이라는 단점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장점이었다.

다만, 여타 건물에 비해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긴 하지만 돈이 아직 많이 모자랐다. …. 나는 깍지를 낀 손에 내 이마를 맞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값어치를 지닌 것들을 세어 보았지만, 몇 가지가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값어치가 나가는 것은 한국에 있는 나의 공방이었다.

나의 공방은 지금껏 살아온 나의 인생. 그 자체였다. 나는 그곳에서 진정으로 내 삶을 살았다. 장작을 때어 가마솥으로 뜨거운 밥을 지어먹고, 두껍고 따뜻한 통나무 침대에서 잠을 자며 작품들을 만들었다. 나의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창고 안에 잠들어 있는 나의 예술품들의 모습들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곳곳에 나의 꿈들이 숨 쉬고 있는 공방을 판다는 것은 정말로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심지어 공방을 판다 하더라도 이 건물을 살만한 돈이 모일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세리는 내가 지금껏 만들어온 어떤 예술품보다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그녀는 내가 예술로 인해 도달하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어떤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세리가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결정이 한결 쉬워졌다. 어떤 재료도, 어떤 도구도 그녀의 약동하는 생명력과 빛나는 광휘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은 세리가 일을 쉬는 날이었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지낼 건물을 보여주기 위해 세리를 데리고 부기스 스트리스로 향했다. 거대한 부기스 스트레스 입구에 도착한 세리가 입을 떠억-. 하고 벌렸다.

“우와…. 엄청 크다.”

“그렇지? 여긴 없는 게 없어. 지금 세리가 하고 있는 ‘밤하늘’의 흑수정 원석도 여기서 산거야.”

“정말?”
 “응. 처음 보는 할머니가 바닥에 보자기를 펴고 원석들을 쭉 펼쳐놓고 있었는데, 흑수정을 보자마자 세리가 떠올랐어.”

나는 여기 처음 온 기념으로, 세리에게 어울리는 옷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세리의 손을 잡고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헤쳐가는 도중, 마침 화려하게 꽃무늬가 새겨진 하얀 티셔츠를 발견했다. 분홍색과 자주색이 인상적으로 새겨진 프린팅 티셔츠가 세리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 예뻐?”

티셔츠를 입은 세리가 내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틀자 꽃무늬들이 화려하게 움직였다.

“응. 정말 아름다워. 이 세상의 어느 것 보다도.”

“웅~.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배운 게 아냐. 내 진심이야.”

세리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의 눈에서 다시금 신뢰의 빛을 발견했다. 세리는 나를 믿는다. 나도 세리를 믿었다.  

세리와 함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석양이 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낮은 건물들 위에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색 하늘에 붉은빛이 아주 옅게 퍼지며 멋진 풍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멋진 풍경 아래 열정적이면서도 느긋한 사람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나는 이 나라가 정말 좋다. 

“세리야. 갈 곳이 있어.”

세리가 눈을 감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세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수많은 관광객들을 해쳐가며 내가 봐 둔 건물로 향했다. 가끔 지나치게 소란스러운 관광객들이 지나갈 때면,

세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세리를 품에 안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움직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있었으나, 나와 세리는 그 사이에서 서로가 존재함에서 안도하면서, 잠시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건물에 도착하자 마지막 남은 석양빛이 건물의 입구에 내려앉으며 길을 비추는 그 광경이 자못 엄숙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잠시 떨어뜨렸다. 나는 이곳에서 세리와 함께 살리라. 해가 뜨면 열정으로 가득 찬 하루를 시작하고, 손님이 들어오면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하며 가끔은 다투더라도 늘 세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리라. 영원히. 언젠가 우리 둘이 영원히 잠드는 그날까지.   

“도착했어.”

나는 세리의 손을 잡고 어둑해지는 건물 안을 천천히 걸었다. 

사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물의 구조를 보며 디테일한 계획을 잡아보았다. 일 층에서 삼 층 까지는 게스트 하우스로 만들고, 사 층에는 세리와 나의 작업실과 방을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일 층으로 관광객들이 들어오면, 내가 만든 작품들이 놓여있는 로비와 카운터가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세리와 내가 그들의 방을 배정해주고, 안내를 해주고….

건물을 다 둘러보고 나서 옥상에 올라가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시장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세리의 티셔츠를 구입한 가게에서 방금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빙글-. 하고 돌자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크게 웃으며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남자의 팔에 기대었고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야시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세리에게 말을 걸었다.

“세리야.”

“응?”
 “이 건물 말이야….”

“?”

“아직 준비가 다 된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나 이 건물 사려고 해.”

세리가 빠르게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이 건물 사 층이잖아. 일 층부터 삼 층까지는 게스트 하우스로 꾸미고, 사 층에는 우리 둘이 살 거야. 보다시피 건물이 좀 낡고 지저분해도, 좀 손보면 괜찮을 거야. 우리 같이 이곳에서 살자. 한국에서 겪었던 아픔들 다 잊고, 새로운 땅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자.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끔 우리를 지치게 하면 느긋하게 수박 주스를 마시면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내가 만든 작품들을 로비에 전시하고, 해가 지고 밤이 다가오면 맥주를 마시며 사람들과 노래하고, 그렇게 우리 서로의 꿈을 이루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그렇게 살자. 타국에서 우리 둘 만의 힘으로 사는 게 쉽진 않겠지만…. 내가 열심히 할게. 세리야.”

세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세리는 자주 우는구나.”

“힝…. 준호가 자꾸 날 울리니까….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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