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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8.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2-

시험받는 믿음 -1-

세리에게 건물을 보여주고 난 후에, 나는 본격적으로 건물의 매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래플즈 호텔의 퇴실이었다. 래플즈 호텔의 숙박비의 가격이 상당히 비쌌고, 이제 현실이 아닌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래플즈 호텔에서 퇴실하기 전 날, 래플즈 호텔의 퇴실 요금까지 지불할 겸, 계좌를 확인해 보았다. 숙박비를 계산해 보았을 때 계좌의 잔액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는데…. 나는 숙박비를 지불하고 남을 액수를 생각하면 한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잔액이라면 건물을 매입하는 것은 턱도 없다. 세리에게 건물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미리 확인이라도 해둘 걸….

빠르게 계산을 해 보았다. 내가 팔 수 있는 것들. 한국에 남겨 두고 온 예술품과 공방…. 정도밖에 없었다.

공방은 산골짜기에 있는 오두막이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받기는 어려웠고, 예술품들은 팔리기까지의 시간과 팔아줄 경매인이 필요했다. 슬프게도, 내가 아는 경매인 중에서 제일 뛰어난 경매인은 서율이었다.

…. 서율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나…. 나는 세리와 나의 행복과 나의 슬픔을 저울질해보았다. 잠깐의 고민을 거쳤지만, 역시나 내가 한 번 자존심을 굽혀 세리와 나의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세리와 함께 이 나라에서 살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침 서율을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여느 때처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향하는 서율을 부르자 호텔 안에서도 짙은 선글라스를 쓴 서율이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잠깐만.”

“…?”

“할 말이 있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카페로 갈까.”

“음….”

서율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승낙한다.

우리는 카페에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나는 차가운 카페라테를, 서율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더운 날씨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다니. 역시 서율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를 불러낸 이유가 뭔가 심상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겠는데 시간이 별로 없거든. 최대한 빨리 이야기해줬으면 해.”

“….”

나는 잠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담배가 매우 피고 싶었지만 잠시만 참아보자.라고 생각했다.

“내 공방이랑 예술품을 처분해 줬으면 해.”

“….”

내 말을 들은 서율이 쓰고 있던 검고 날렵한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녀의 시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냉기가 얼음이 가득 찬 카페라테보다 더 차게 느껴져, 잠시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무슨 이유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어. 그저 좋은 값에 처분해 줬으면 해.”

“아니. 알려주지 않으면 하지 않을 거야.”

“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서율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봐 둔 건물이 있고, 건물을 매입하여 세리와 함께 이곳에 살고 싶다. 하지만 지금 가진 금액으로는 모자라다. 그래서 내일 래플즈 호텔에서 퇴실할 예정이고, 한국에 나의 공방과 예술품을 매매해서 건물의 구입에 보태고 싶지만 아마 돈이 모자랄 것 같다. 도와줬으면 좋겠다.

“필요한 금액은?”
 나는 대충 내가 가진 금액과 건물의 가격을 생각해 본 후에, 대답했다. 

“…. 그때 내가 본 이후로 예술품이 크게 늘었나?”

“아니.”

“음….”

서율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을 시작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남은 카페라테를 다 마시고, 차가운 카페라테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주문한 음료가 도착할 때 즈음에, 서율의 대답이 나왔다.

“아마 경매를 시작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그래도 한참 부족할 걸.”

나는 고개를 숙였다. 서율이 연인으로써의 신뢰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매인으로써의 능력은 출중한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계산한 대로라면 그게 아마 맞을 것이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서율의 날카로운 일침에, 마음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져 담뱃갑을 들고 자리를 일어나 야외 테라스로 나섰다.

첫 담배를 다 피워갈 무렵에 서율이 나타났다. 서율은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있었는데, 그 짙고 검은 선글라스 밑에 살짝 웃음기가 감도는 입이 보였다.  

“그렇게 세리가 좋아?”
 “…. 응.”

“후음…. 질투 나는데.”

서율이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건네주었고, 담배에 불을 붙인 서율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네 계획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너는 싱가포르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군. 여기 건물 말이야. 백억이 있어도 사기가 쉽지 않아. 아마 네가 중개인에게 건물 가격을 알아봤겠지만, 단순히 그 사람이 말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필요하지. 게다가 준비해야 할 것이 아주 많아. 현실적으로 네가 이 곳 싱가포르에서 건물을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렇지만….”

“옛날부터 넌 그랬지. 현실 감각이 너무 없었어.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됐지만, 이번만은 안 될 거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

“….”

“대신에 좋은 방법이 있어. 실은 우리 회사도 이번에 싱가포르 지부를 새로 만들 생각이 있었거든. 지난번에 네게 말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어서 말이야. 만약 네가 괜찮다면 회사 가 만들기로 한 공방에 너를 입주시켜 줄 수도 있지. 그 대신 세 가지 조건이 있어.”

“음….”

“첫째. 한국에 있는 너의 공방은 우리가 갖는 걸로 하지. 작품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은 모두 네 것. 너의 예술품은 모두 회사가 가지는 걸로. 가치가 제법 될 것 같거든. 조금 있다가 말할 세 번째 조건을 네가 충족시킨다면 말이야. 그건 잠시 후에 설명하지. 둘째. 만약 이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면 너에게 제공될 공방은 네가 운영하는 공방이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회사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줘. 그리고 회사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것도. 내가 너에게 이런 제의를 하는 것도 너의 발전 가능성이 우리 회사에 많은 이윤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야. 지금까지는 네 스스로 만든 작품이 많았지만, 우리 회사에서 의뢰하는 물품도 만들어야 될 거야.”

“….”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조건이야.”

말을 가다듬던 서율이 담뱃재를 한 번 털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옛날에 말한 ‘아트 오브 콜로세움’ 말이야. 그 대회가 이번에 우리 회사가 싱가포르 지부로 진출하는 것을 기념할 겸 여기 싱가포르에서 열릴 거야. 그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 해.”

“음….”

“만약 네가 우승을 못한다면, 다른 우승자에게 그 모든 혜택을 줄 거야. 공방은 비싸니까. 미리 말해주자면, 쟁쟁한 경쟁자가 꽤 많아.”

“….”

“내 성격 알지? 너라고 해서 특혜 같은 거 전혀 주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치고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이 서늘하다.

“나는 내일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회사로 돌아가 보고를 해야 하거든.”

서율이 담배를 마저 다 피우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끌 때, 나는 핸드폰을 꺼내 서율의 연락처가 있는지 확인했다.

“오래 기다려 줄 순 없어. 반드시 내일 저녁에 내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답을 줘야 해.”

말을 마친 서율이 자리를 떠났다. 자리에 남은 나는 세리에게 서율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다음 날, 세리와 함께 서율이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서율은 저녁 비행기를 탈 예정이지만 아침부터 할 일이 있다며 미리 호텔을 떠난다고 했다. 세리는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서율을 만나겠다며 포옹을 했고, 나는 서율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일단 한국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두 분도 한국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저를 찾아줘요.”

“네. 언니. 언니도 싱가포르 올 일 있으면 꼭 우리를 찾아줘요.”

“음…?”

고개를 갸웃한 서율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세리를 바라보았다.

“두 분은 한국에…. 돌아가시지 않을 건가요?”

세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리가 기쁜 얼굴로 서율에게 말했다.

“응. 우리 둘은 여기 싱가포르에서 같이 살기로 했어요.”

“우와. 그럼 두 분은 여기서 결혼하시는 거예요?”

세리가 얼굴을 붉혔다. 나도 괜히 멋쩍어진 얼굴을 돌리며 머리 뒤를 긁적였다.

“음….”

“이런. 괜한 질문을 했나 보네요. 여하튼 알겠어요. 다음에 꼭 뵈었으면 좋겠어요. 두 분과 함께 싱가포르를 거니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으니까요.”     

아침에 그렇게 서율을 보내고, 우리도 퇴실할 준비를 했다. 짐을 대충 싸고, 세리와 래플즈 호텔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옛날에 세리가 묵었던 차이나타운에 있던 모텔로 옮겨갈 예정이었다. 

“여기서 밥 먹는 것도 마지막이네….”

포크를 연어에 찔러 넣던 세리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나는 괜히 세리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신선한 과일이 가득 쌓인 접시를 밀어주었다.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다시 돌아오자. 우리.”

“응…. 우리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라 떠나기가 아쉬워….”

“미안해. 내가 돈이 좀 더 많았더라면….”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아쉽다는 거야.”

세리가 다급하게 말을 붙잡았지만, 이미 나도 기분이 다소 울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리가 조금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단 세리만 그 기분을 느낀 것을 아니었을 텐데.

세리와 나는 이곳에 오래 있었고, 직원들과 제법 친해져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동안 이 곳에 깃든 우리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감상에 빠졌다. 

이야기가 끝나자, 서율의 제안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도 빠를 수 있겠지.

점심을 다 먹고 나서 다시 로비와 체크아웃을 했다. 예상했었지만 꽤 큰 금액이 지출되고, 영수증을 받아 들자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잘 지내세요. 미스터 준호. 미스 세리.”

“행복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들려주세요.”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일일이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들의 진심 어린 인사에 감동하여 직원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나눠주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직원 전체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들은 그 사진을 호텔 로비에 전시해 놓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래플즈 호텔을 나서고도 한참을 정문 앞에 먹먹한 가슴으로 서 있었다.

호텔 측의 배려로 제공해준 차량에 짐을 싣고 세리와 함께 차이나타운에 장기 계약을 맺은 모텔로 향했다. 비록 래플즈 호텔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고, 방도 많이 작았지만 세리와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래플즈 호텔보다 더욱더 의미가 큰 곳이었다. 나는 모텔에 도착해 세리와 함께 짐을 풀면서 다시금 서율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중개인에게 연락을 해보고,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서율의 말이 맞았다. 내가 생각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필요한 상태였고, 그것은 지금의 내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가질 수 없는 금액이 분명했다. 게다가 신원과 금액이 확실한 보증인도 필요했는데, 나에게 그런 보증인은 없었다. 결국 나와 세리, 우리 둘 만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만 확인하는 꼴이 되었다.

나의 공방을 넘기고, 그녀의 회사에 들어가는 것…. 그렇다는 것은 서율과 다시 연인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더라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다시는 그럴 일이 일어나지를 않기 바라왔지만…. 

그러나 거절하기는 상당히 좋은 조건이 틀림없었다. 서율의 회사는 한국에서 경매로 크게 성공하고 있는 회사였고, 지금까지 나 혼자 벌던 수입과는 차원이 다른 수입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그 금액을 모으다 보면 꿈꿔왔던 세리와 나의 단독 공방을 차릴 수 도 있겠지….

나는 단지 세리와 이곳에서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을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은 나를 꽤나 괴롭게 하고 있었지만, 그 괴로움은 건물을 둘러보고 난 후의 세리의 표정이 발하는 빛을 다시금 볼 수 있는 대가라면 꽤 작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런 일련의 생각들에 빠져 들어 있었던 나는 짐을 다 풀은 세리가 배가 고프다며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세리는 내가 부기스 스트레스에서 사준 옷을 며칠 째 입고 있었다. 괜히 한 벌을 사준 게 미안해서 더 사주겠다고 이야기를 꺼내 보았으나, 세리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 돈 모아야 되잖아. 건물 살려면 돈 많이 필요하지 않아?”
 “으…응. 맞아. 돈 모아야지.”

“그래서 내가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중국 요리 집을 알아봤어. 여기서 멀지도 않아. 오징어 볶음이 대표 메뉴라는데. 생각해보니 싱가포르 와서 오징어 요리는 안 먹어봤던 것 같아.”

세리가 내 손을 잡고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자그마한 손. 하늘거리는 꽃무늬. 앵두 같은 입술. 커다란 눈. 바람에 따라 가늘게 흔들리는 긴 머리칼. 절대 바닥나지 않을 것 같은, 끊임없이 약동하는 생명력…. 이 여자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나의 옆에서 영원히 함께 할 여자.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여자.

세리가 나를 데려간 중국집은 다소 시끄럽고 번잡했지만, 확실히 세리가 주장한 대로 저렴하면서도 푸짐한 음식이 나왔다. 내가 나무젓가락을 들어 세리의 앞 접시에 오징어를 조금씩 덜어주자, 세리가 말했다.

“나 너무 행복해. 준호야. 준호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싱가포르에 감사하고, 준호와 함께 미래를 꿈꾸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 매일 오징어 볶음만 먹어도 좋아. 그리고…. 언제나 준호가 내 곁을 지켜 줄 거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

세리가 마지막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목소리를 떨었기 때문에, 나는 젓가락을 잡지 않은 손으로 세리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나도 그래. 세리야. 너무 감사해. 세리가 내 곁에 있음에. 우리 이렇게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영원히 같이 있자.”

“응.”

나는 방금 볶아낸 촘촘하게 칼질이 되어 있는 고소하고 쫄깃한 오징어볶음을 입에 넣으면서, 서율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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