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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8.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3

시험받는 믿음 -3-

서율에게 답장이 왔다.  

“만나서 이야기해.”

한동안 핸드폰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작성하던 문서를 저장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외출할 준비를 했다. 서율은 아마 회사에 있을 것이다.

신발을 신으며 문득 창밖을 보았는데,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도 그칠 생각을 하기는커녕 더욱더 기세를 가하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로 가득한 세상이 꿈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 홀로 탄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지상을 향해 하강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가 문득 거울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문득 제법 늙어 보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현실감을 잃어갔다. 마음은 현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면서 시간은 덧없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풀어야 할 매듭을 풀지 않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거울에 비친 찰나의 내 모습에서 나는 과거의 환영을 보았다.      

빗방울들이 차창의 앞 유리를 빠르게 두드렸다. 두두-. 두둑-. 그 무거운 소리 속에서 옅은 회색의 현재의 내가 흐릿한 세상을 질주하는 것이 왠지 마음이 편했고, 이치에 맞는 행위인 것 같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퍼가 정신없이 앞 유리를 닦아내었지만,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앞 유리를 두들겼다. 닦아도, 닦아도 끊임없이 흐르는 물.

비록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서율은 여전했다. 어떤 일이라도 놀라는 법이 없었다. 젊었을 적에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게 강했던 그녀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믿음이 더욱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보면 그 믿음은 옳은 것처럼 보였다.

세월이 지나며 그녀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지만, 나는 점점 약해져 가고 있음을 늘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것의 원인이 각자가 원하는 것에 대한 충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뤘지만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율은 계속해서 회사에서 승승장구했고, 마찬가지로 나의 공방은 점점 늘어갔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공방은 하나만으로 충분했지만, 서율은 계속해서 내가 공방을 확장하길 원했는데, 내가 여러 공방을 운영함으로써 회사와 나, 둘 다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물이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나는 젊은 날 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과 명예를 얻었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밤 꿈속에서 싱가포르의 강렬한 열기 아래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서율은 내게 담배를 권했으나 나는 고개를 젓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최근 세리와의 이야기를 쓰면서 담배를 끊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이상 서율이 내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을 받고 싶지 않았다.

“웬 일이야? 담배를 거절하고.”

“그냥. 최근에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서율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나를 등지고 창을 향해 선 서율의 뒷모습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서율과 나의 관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멀고, 친구사이라고 하기는 너무 가까운. 예술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회의를 하고, 가끔 같이 술을 마셨지만 마음과 몸을 섞진 않았다. 한 번 깨어졌다가 다시 붙기 시작했던 마음은 최후의 일격을 맞은 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마음이 없는 몸은 매캐하고 흐릿한 재가 되어 다시는 불타오르지 않았다.

“그래. 문자 읽었어.”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서율이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립스틱을 짙게 바른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에서 미처 다 뿜지 못한 담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책을 내겠다고.”

“그래.”

“흠…. 내용이 세리와 너의 이야기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맞아?”
 “응. 맞아.”

“….”

서율이 내 반대편에 앉았다. 느리고도 매혹적인 움직임으로 다리를 꼰 서율이 두 손을 깍지를 끼고 무릎에 올렸다.
 “뭐. 세월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어.”
 서율이 다시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았다. 서율은 내가 세리와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말을 무엇인가를 느낀 것 같았다.

"…. 책을 쓴다고 해서 지원해 줄 수는 없어. 우리 회사는 책을 내는 회사는 아니니까.”

“지원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야. 나 스스로의 힘으로 낼 거야.”

“꼭 내야겠어?”

나는 끄덕이는 고개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의 눈빛을 살펴본 서율이 고개를 떨구었다.

“넌 늘 그랬지. 늘 제멋대로였어. 자신이 정한 일은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 가를 알면서도. 정말 바보 같아. 현명하지 못해. 아무렇지도 않게 신념으로 상처를 주지. 너는 내 힘이 닿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어.”

물기가 어린 서율의 목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서율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서율의 말이 맞았다. 분명히 나도 서율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나도 서율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서율과 내가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너무 닮았기에 다시 사랑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그동안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십 년 동안 하지 못한 말 한마디를 해야 했기에.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적셔가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  

“흐음….”

깊은 한숨을 쉰 서율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위스키와 잔을 꺼내어 늘 마시던 방법으로 잔에 술을 채웠다. 각 얼음 두 개. 레몬 슬라이스 하나. 서율은 자신의 방법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싱가포르로 가겠네. 일은 그만두는 거야?”

“당분간은 그만두겠지만…. 글쎄…. 잘 모르겠어. 아마 그럴 것 같지만…. 일단 갔다 와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휴….”

한숨을 내쉰 서율이 위스키를 들이켰다. 짙은 위스키의 향이 풍기는 숨을 내쉬는 서율의 모습이 슬프다. 그 모습을 보자니 미안함이 한층 커졌지만 더 이상 나의 과거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는 서율의 모습을 뒤로하고 문을 닫고 나왔다. 잠시 동안 갖가지 문양이 각인된 두꺼운 동백나무문을 뒤로하고 서율이 누군가를 다시금 사랑할 수 있기를 빌다가 문득 누군가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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