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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8.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4-

마지막 한 걸음 -1-

세리와 오징어볶음을 다 먹고 나서, 서율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좋아. 하겠어.’

세리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을 사기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모자랐다. 그래서 건물을 사기 전까지 당분간 회사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안정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회사는 서율이 일하는 곳이다. …. 서율은 나와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세리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그 여자가 서율이라는 것을 말이야.’     

세 개의 문장을 숨긴다.     

그 회사는 서율이 일하는 곳이다. 서율은 나와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 조금 부자연스럽지만, 안정적이다.     

세리에게 말할 문장들을 완성하고 나자, 서율에게서 답장이 왔다.

'OK.'     

그날 밤, 나는 세리에게 완성된 문장들을 풀어놓았다. 

건물을 사기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모자랐다. 알아보니 이번에 예술품을 공모하는 큰 대회가 있더라. 그 대회에서 우승하면 공방도 얻으면서 회사에 들어갈 수 있고, 안정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회사 이름을 들은 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움…. 잘 된… 거야?”
 “응. 뭐. 그럭저럭. 지금 당장 건물을 매입할 순 없지만 언젠가 매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거니까. 자신 있어.”

“응. 나도 준호를 믿어. 준호는 할 수 있어.”

세리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나의 착잡한 기분 탓인지 세리의 미소에는 환한 빛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말라 보이는 미소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거니까.”

그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세리는 낮에 하는 일을 하나 더 추가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일을 하겠다는 세리의 말에 기겁했던 나지만, 돈을 모아야 한다는 세리의 의견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었다.

“돈도 벌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우승하면 되잖아. 우승할 수 있다니까.”

“나도 준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나도 당당해지고 싶단 말이야.”

세리가 기특하기도 했지만, 나를 좀 더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왜 나를 좀 더 믿지 못하는 것 일까. 자신감이 조금 수그러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세리의 선한 의도에 대하여 내가 반박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하여 의견을 표시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 후, 서율에게 연락이 온 내용에 의하면 서율이 계획한 큰 경매의 개최일은 대략 한 달 정도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회사가 만족할 만한 창작품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예술품에 대한 스케치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매일 밤을 새 가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어느 날인가, 밤을 새우며 새로 만들 작품에 대한 스케치를 하고 있다가, 세리가 또 래플즈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작업이 잘 되지 않아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있었기 때문에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튀어 나가 버렸다.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돈이 많지가 않아. 래플즈 호텔은 천국 같은 곳이지만 숙박비가 너무 비싸다고.”

“으…응. 나도 알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야.”

“우승할 거야.”

“….”

“꼭 우승해낼 거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여줄 의도로 낸 큰 목소리에 세리가 주눅 들어버린 모습이 보였다. 세리는 아마 내가 화를 낸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세리의 축 늘어진 입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끝없는 그녀의 생명력이 자취를 감추고 그녀는 머나먼 사람이 된다.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내가 싫었고, 세리가 싫었다.

나는 늘 내 사랑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사랑이란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내가 가진 재능을 총동원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때문에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종종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곤 했는데, 세리는 나의 그런 모습에 가끔 겁에 질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감정을 제어하려 최대한 노력하려 했으나, 가끔 내가 생각했던 꿈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감정이 날뛰는 경우가 있었다.     

일주일 후, 서율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서율은 며칠 더 있다가 싱가포르로 온다는 말과 함께 싱가포르에 공사가 끝난 회사의 건물 주소를 동봉해서 보냈고, 건물로 가면 안내를 도와줄 직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세리가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세리와 함께 공방을 가보기로 하였다.

건물은 리틀 인디아 역과 부기스 역 사이에 있었다. 근처에 유명한 예술학교가 위치해 있었고, 뛰어난 인재와 예술품을 구입해 줄 만한 관광객들을 동시에 사로잡을 만한 좋은 위치.

역시 서율의 안목은 탁월하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리의 손을 잡고 차이나타운 역으로 향했다.

건물을 발견한 세리가 입을 살짝 벌리고 한 마디 했다.

“멋져….”

가로가 조금 긴 직사각형의 건물. 내부가 환하게 드러나 보이는 투명한 유리가 사 방면 모두에 배치되어 있었고, 각 귀퉁이에는 두꺼운 검은색의 기둥이 건물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건물은 삼 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삼 층만은 흰색의 벽으로 칠해진 것으로 보아 아마 주거지로 사용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정말 멋진 건물이야.”

나는 세리의 감탄에 동의를 표하면서 저 건물의 옥상에서 세리와 함께 싱가포르의 밤을 내려다보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마감이 얼마 끝나지 않은 건물 특유의 냄새가 강렬하게 코로 들어왔다. 나무로 된 마루가 말끔하게 자태를 드러냈고,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안락하고 평온해 보였다.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

저 안쪽에서 무언가를 만지고 있던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인도인 특유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탄탄한 체구가 돋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를 보는 시선을 감지한 세리가 나의 팔을 툭 쳤다. 나는 세리에게 머쓱한 표정을 짓고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는 ‘준호’라고 이번 ‘아트 오브 콜로세움’에 참가할 참여자입니다.”

내 말을 들은 여자가 바로 능숙한 한국어로 대꾸했다.

“그러시군요. 저는 이 건물의 안내를 맡은 직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줄리아라고 합니다.”

직원이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회사의 이름과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다.

줄리아는 내게 악수를 청하다가 내 옆의 세리를 보고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 모습을 본 세리가 내게 좀 더 달라붙었고, 나는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말이 능숙하시네요.”

“아. 네. 한국에서 근무를 몇 년 해봐서 한국말에 익숙합니다. 저 그때 준호 씨가 만든 ‘연리지’도 본 적 있습니다. 준호 씨 팬이에요.”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연리지…?”

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멈칫한 나는 세리에게 

“응. 한국에 있을 때 만든 예술품 있어.”

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서로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나서, 줄리아는 우리에게 공방 전체를 견학시켜주었다. 공방 곳곳에 세심한 손길이 깃들어 있었다. 모던하면서 세련된 문양들과 작업 시의 순서를 고려한 도구들의 배치들. 십이간지가 번갈아가며 각인되어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에서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멋지고 놀라운 광경들이 계속해서 내 시선을 잡아 이끌었다.

“좋은 건물이네요. 정말 멋지군요. 여기저기에 예술들이 살아 숨 쉬고 있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준호 씨가 우승해서 이곳에서 좋은 작품을 만드시기를 기원할게요.”

나는 줄리아가 내민 대회의 팸플릿을 받아 들었다. 팸플릿 정면에 쓰인 

-아트 오브 콜로세움-

이라는 이름이 빨간색으로 강렬하게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이 글씨를 디자인한 사람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접혀 있는 팸플릿을 펼치자 왼손 약지에 ‘연리지’를 낀 서율의 두 손이 탁자의 위에 놓여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나와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잠시 돌아 세리가 어디 있는 지를 확인해보고는, 시야에 세리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에 안도한 후에 팸플릿을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세리는 건물 삼 층에 있었다. 세리는 여기저기를 쓰다듬어 보고 감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끔 손을 들어 무언가의 위치를 배치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 그것이 우리가 살게 되었을 때의 가구 배치를 예상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세리의 뒤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세리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여기서 우리가 같이 사는 거야. 같이 해 나가는 거야. 할 수 있어.”

그 말을 듣고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다보는 세리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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