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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8.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5-

마지막 한 걸음 -2-

건물에서 돌아오고 나서 세리가 침대에서 주중에 일을 하느라 못 잤던 잠을 몰아 자는 사이, 나는 모텔 앞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실 세리에게 자신 있게 말한 것과는 달리 그동안 예술품의 창작이 잘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공방에서 작업하는 것과 모텔에서 작업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진 도구로는 내가 원하는 퀄리티가 나올 수가 없었다. 공방에 있는 도구들을 이 모텔로 가져온다 하더라도 공간이나 소음 등 문제가 상당히 많았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나무 조각이나 간단한 공예품 따위의 것들이었다.

잠시 한국의 공방으로 돌아가 작업을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세리와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세리가 출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을 견디기도 힘든데 저 먼 한국으로 나 혼자 돌아간다면….

그렇다고 이곳에서 내가 원하는 퀄리티의 작품을 생산해 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손에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필터까지 거의 다 타버린 담배를 비벼 끄고, 씁쓸한 마음을 안고 모텔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오니 아직도 세리는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반쯤 입을 벌린 무사 태평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세리를 잠시 지켜보던 나는 겉옷을 벗고 손과 입안을 헹궈 최대한 담배 냄새를 없앤 후에 세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우웅….”

잠시 잠꼬대를 하는 듯 소리를 내던 세리가 양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세리의 손길을 느끼며 품 안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담배냄새….”

세리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세리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머리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세리가 조금 더 강하게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괜찮아…. 괜찮아. 준호야.” 

채 해가 지지 않은 싱가포르의 햇빛이 반쯤 열린 작은 창문을 타고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따뜻한 햇볕과 밖에서 물건의 이제는 정겨운 가격을 외치는 중국인들의 말투와. 젊은 사람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의 작은 발이 뛰어다니며 내는 작은 발소리. 창문을 조심스럽게 살랑이는 부드러운 바람과 에어컨에서 나오는 기분 좋은 냉기. 

그리고 옆에 내게 괜찮다고 말하는 세리가 있다. 그날 해 지던 센토사 섬에서 멀라이언 나무 조각을 만들던 날처럼. 이 꿈같은 곳에서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서 한동안 세리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자니 그동안 쌓였던 고민이 눈 녹듯 사라졌다.

세리와 싱가포르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해 낼 것이다.     

서율이 싱가포르로 돌아왔다는 연락을 주었다. 서율은 래플즈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 층 야외에 마련된 카페에서 서율을 만났다. 로비에 들어서자 잠시 아련한 그리움이 내 가슴속에 파고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서율과 약속했던 야외 카페로 향했다.

여전히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서율을 보면서, 나는 차가운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뭐…. 그럭저럭 그래.”

“그래. 약속한 대로 일단 공방과 공방 안에 있는 예술품들을 처리하기 위해 견적을 잡아보았어. ‘연리지’의 인기 덕분에 높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을 했어.”

서율이 계약서를 꺼냈다. 복잡한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보고, 마지막에 적혀 있는 예술품들의 예상 총매매가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평가받았기 때문이었다. 열 자리의 숫자 사이사이에 쉼표가 무려 세 개나 찍혀 있는 광경을 보고, 나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네가 공방 안에 있던 예술품들과 너의 공방을 우리가 그대로 인수인계한다는 내용이야. 작업 도구는 네가 바란다면 너에게 줄 것이고 만약에 필요 없다고 하면, 회사가 알아서 처분을 할 거야.”

서율이 빙긋 웃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네가 우승한다는 조건 하에. 우승하지 못한다면 이건 없던 일이 되는 거야.”

“그…. 그래.”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상당히 많은 돈이다. 세리와 함께 살 수 있을 날이 훨씬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고양시켰다.

“고마워. 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야.”

“후후….” 

서율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기뻐 보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서율과 같이 웃었다.

“뭐,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났고 대회에 출품할 작품은 만들고 있어?”

서율이 선글라스를 살짝 고쳐 쓰면서 물었다. 나는 긴장한 태도로 등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예술품 몇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선글라스를 벗고 천천히 예술품들을 살피던 서율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저 그렇네.”

서율이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실망이야.”

‘실망’이라는 단어가 싸늘하게 심장에 박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에는 그동안 내가 만든 여러 가지 공예품들이 놓여있었다. 

서율은 이것저것 집어 들고는 몇 번 정도 물건을 돌려보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특별함이 없어. 특별함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아는 준호는 이 정도가 아닌데.”

“….”

“공방에 있던 물건들보다 훨씬 퀄리티가 떨어져. 뭐. 내 기대가 너무나 컸던 탓도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서율이 핸드백을 들고 야외 흡연실로 향했고, 나는 서율의 뒤를 따랐다. 핸드백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서율이 말을 이었다.

“이 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특별한 수라도 있는 거야?”

“…. 아니.”

“이걸로는 우승하긴 힘들어. 다른 건 없어?”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혹여나 빠트리고 나온 것이 있을까. 가느다란 생각 들이 줄을 이어 서로에게 맞닿고 다시 헤어지고를 반복하다가, 마침 머릿속에 떠오른 물건이 있었다.

“….”

“뭔가 있는 모양인데.”

“…. 아니야.”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으나, 서율이 뭔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뭐. 아무렴 좋아. 그 날에는 네가 만든 것 중에 어떤 거라도 날 만족시킬 물건을 가져오는 게 좋을 거야.”     

래플즈 호텔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몇 가지의 공예품을 테이블 위에 늘어다 놓고 고심에 빠졌다.

확실히 서율의 말 대로 나름 공을 들인 작품들이었지만, 임팩트가 없었다. 대상 정도 되려면 무엇보다 독창성이 제일 돋보여야 할 텐데….

나는 서율의 눈썰미를 꽤나 잘 알고 있다. 내 심장까지 닿았던 그 차갑게 내려앉은 침착한 눈빛. 그녀는 이 작품들로 만족을 못 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저 그렇네.’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한동안 예술품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예술품들을 다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너무 안일하게 우리의 행복을 바란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너무 큰 것을 바란 게 아닐까. 

나는 문득 잠이 든 세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요새 세리는 일에 지쳐 퇴근을 하자마자 잠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 잠을 자지 않고 같이 식사를 하더라도, 눈에 띄게 말수와 생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하루 종일 작품을 만드는 것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우리가 같이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게 점점 힘들어져갔다.  

가끔 피곤한 얼굴로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세리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괴로움을 느꼈다. 그녀에게 늘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다. 이런 인스턴트 음식이 아닌 갓 조리된 신선한 음식과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커피를. 공을 들여 만든 아름다운 옷들과 그녀가 좋아하는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하루를.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길에, 세리가 잠들기 전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밤하늘’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방을 나섰다.     

“자. 질문 시간입니다. 작가님께 궁금한 걸 물어보시는 시간이에요.”

사회자가 말을 마쳤다. 여기저기서 손이 정신없이 올라왔다. 나는 손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신기하게도 자글자글하고 주름이 많은 손이 보여서 그 손을 골랐다.

“네. 저기 어르신 한 분이 오셨네요. 어르신의 질문을 들어보겠습니다.”

질문자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그분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어르신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찬가지로 어르신도 내게 고개를 꾸벅-. 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어르신이 마이크를 툭툭 쳐보고는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좌중이 잠시 웃음바다가 됐다.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어르신이 질문을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준호 작가님은 왜 세리 씨랑 이별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의자 뒤로 잠시 몸을 묻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진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마를 문질렀다. 잠시 사회자가 내 눈치를 보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음…. 이별에는 딱히 한 가지 요인만 있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저도 세리를 더 믿지 못했고, 세리도 나를 조금 더 믿지 못했다는 것.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지 못한 주름이 자리 잡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저분도 나처럼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때문일까.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 사건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긴 합니다. 저는 결국 서율의 방식을 택했으니까요.”            

세리는 요새 피곤함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세상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커다랗던 눈이 조금씩 피곤으로 인해 점점 내려앉고 있었고, 모텔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잠에 들기 일쑤였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잠에 드는 적이 많았고, 그 피곤 때문인지, 점점 내게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비가 오던 밤에,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세리가 옷도 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워 바로 잠든 적이 있었다. 스케치를 하던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이 몸을 던진 세리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세리가 비를 맞고 왔는지 침대가 축축해져 있었다. 이대로 잠들면 에어컨 때문에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아 일으켜 세웠다.

“세리야. 이대로 자면 감기 들어. 씻고 자자. 응?”

“….”

세리는 대답이 없었다. 혹시 벌써 잠든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세리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꼭 감고 있는 세리의 얼굴에서 피곤이 진하게 묻어났다.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세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때, 세리가 무언가 웅얼거렸다.

“… 둬.”

“응?”

“나 좀 내버려둬….”

“….”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그제야 세리에게 조금 비릿한 비 냄새뿐만 아니라 약간의 술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조금 세리에게 떨어져 침대 가장자리에서 세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에 욕실에서 쏴아-. 하는 물소리에 섞여서 무언가 다른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세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지레짐작만이지만, 아마 일이 힘들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최근에 세리에게 몇 번 정도 일을 하나로 줄이라고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거부뿐이었다.

나는 세리를 돕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회의 우승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돈이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대회 이틀 전, 최종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서율을 찾았다. 야외 카페에 앉아 여전히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서율의 앞에 앉아 헝겊 주머니에서 ‘밤하늘’을 꺼냈다.

“음….”

서율이 ‘밤하늘’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세리가 차고 있던 물건이네.”
 ‘밤하늘’에서 시선을 땐 서율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던져준 공을 물고 온 개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혹시 서율은 애당초 ‘밤하늘’을 노렸던 것이 아닐까. 잠시 그 생각에 서늘함을 느꼈지만, 곧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여야만 했다.

“아름다운 물건이야. 대상을 노려도 될 정도로. 무엇보다 정성이 돋보이는 물건이군.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이 작은 멀라이언 천사들을 새김질하는 광경이 떠오르는 걸. 흑수정의 결도 좀 독특하고 말이야.”

서율이 이런저런 평을 하는 사이에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던 세리가 ‘밤하늘’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하는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출근하기 전까지도 열심히 방을 찾아다니며 ‘밤하늘’을 찾던 세리는 내가 본모습 중에서 제일 슬픈 모습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미소마저 잃어버린 세리가 가여웠지만, 곧 대상을 수상하면 전보다 더 멋진 미소를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애써 외면했던 그 표정.

“좋아. 이 정도면 괜찮겠어.”

서율이 방긋 웃었다. 세리의 잃어버린 미소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 공방을 생각하며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회 당일 날, 세리는 출근했다. 주말에 손님이 많은 가게 입장 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세리를 위로하면서 한편으로 안도했고, 그런 나의 나 자산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꼭 보러 왔으면 좋을 텐데.”

“미안해. 가게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 봐.”

“괜찮아.”

나는 세리를 안아주다가, 세리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꼭 대상을 타서, 공방을 얻을게. 그리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자. 우리 둘이.”
 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바보같이 왜 울어.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울지 마.”

“응…. 미안해. 준호는 이렇게 날 생각해주는데 소중한 ‘밤하늘’도 잃어버리고…. 난 정말 바보인 가봐.”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나에게는 ‘밤하늘’보다 세리가 훨씬 중요한 걸. 늦겠다. 출발해야지.”   

나는 출근하는 세리를 한 번 더 강하게 안아주며 문득 언제까지 세리에게 서율과 나의 관계를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상을 타게 되고, 공방을 얻게 된다면 서율이 일하는 회사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서율을 만날 일이 많아질 것이었다. 

이번에 대상을 타면 세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 하자. 서율과 한때 사랑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고, 서율도 지금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밤하늘’은 원본은 다시 세리에게 돌려주겠다고. 그동안 의도치 않게 속여서 정말 미안했고,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함이었으며 나는 진심으로 세리를 사랑한다고.

대회는 에스플러네이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뾰족뾰족한 지붕이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과일인 두리안을 닮았기에 두리안이라는 별명을 지닌 커다란 복합 문화 공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율이 보낸 택시를 타고 에스플러네이드로 향하는 길에 멀라이언 공원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시원하게 물을 뿜고 있는 멀라이언을 보면서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으며

‘세리와 내가 여기서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고 빌었다. 

에스플러네이드에 도착하자, 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을 보면서 서율과 회사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이번에 대상을 타고나면, 서율과도 관계가 개선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여자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에게 상당히 많은 기회를 준 여자였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나와 세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서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묘하게 꼬여 있던 이 모든 것은 내가 대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하는 한 걸음. 그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유일무이한 기회다. 나는 이를 질끈 물고 각오를 다진 후에 행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줄리아가 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준호 씨.”

“네. 반갑습니다.”
 “오늘 대회에서 좋은 소식 있으시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아참, 서율 과장님도 곧 도착하실 겁니다. 우선은 대기실로 안내해드릴게요.”

줄리아는 나를 행사장 뒤쪽에 마련된 대기실로 안내했다. 대기실에는 자그마하고 안락한 의자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대기실에서 대기하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희 직원을 찾아주세요. 뭐든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 네. 혹시 흡연실은 어디 있나요?”

“아. 흡연실은 에스플러네이드 입구 근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상세한 위치를 설명해 준 줄리아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준비되어 있는 탄산음료를 하나 들고 머릿속으로 길을 그리며 흡연실로 향했다. 

음료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대회는 약 한 시간 정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점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초조함이 마음속에 가득했고, 차라리 어서 빨리 대회가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담배를 태우는데, 저 멀리서 검고 긴 실루엣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처럼, 마치 자신의 피부같이 자연스럽게 달라붙는 검은색의 사르륵 흘러내리는 원피스. 등 뒤의 지퍼로 유혹하는 그 검은색의 자태.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던 그 옷.

“안녕. 벌써 왔네.”

서율이 긴 다리를 뽐내듯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안 그래도 큰 키가 검은색의 하이힐 덕분에 더 크게 보였다. 거의 나와 신장이 비슷한 여자가, 그것도 싱가포르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동양의 흰 피부를 가진 여자가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에 시선이 집중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수록 더 강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여자. 그것이 서율이었다. 나는 가끔 서율의 힘의 한계가 어디까지 일까. 하고 가늠해 보았지만, 끝을 알 수 없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반응이 좋아. 대상까지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어. 뭐. 워낙 좋은 작품들도 많아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서율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세리는?”

“세리는 일하러 갔어.”

“저런….”

불을 붙인 서율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유감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단지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대회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고심 끝에 서율을 믿기로 하였다. 안타깝게도(한편으로는 다행으로) 세리가 없는 이 장소에서, 우리 셋은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미래를 향 한 한 걸음을 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서율은 자신의 회사에서 자신의 승진을 노릴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공방을 얻어서 예술품을 계속 제작함으로써 나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세리와 함께 미래를 꿈꾸며 살 수 있을 것이며, 세리도 나와 함께 상처 많았던 한국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함께 미래를 꿈꾸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서율을 믿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여자지만.

나는 서율에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너와 내가 한 때 사랑했다는 사실을 세리가 모르고 있고, 현재 네가 싱가포르에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대상을 수상하고 나면 모든 것을 세리에게 실토할 것이며, 우리 셋이 그동안 숨겨왔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진정한 관계로 다시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실은….”

내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어. 우리 사이를 말이야. 사실 과거에는 너 때문에 정말 힘들었었고, 네가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었어. 하지만, 어떻게 보자면 너는 네 방식 나름으로 나를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해. 지금 이렇게 내가 싱가포르에서 세리와 함께 미래를 꿈꾸는 것도 네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어찌 됐든 간에 너에게 흔치 않은 기회를 받았고, 그걸로 인해 나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고,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해.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고마워.”

내 말을 듣고 있던 서율의 입이 가늘어졌다. 뭔가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려는 듯한 그 움직임을 한동안 주시했지만, 서율과 함께 다시 대회장에 들어갈 때까지, 그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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