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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28.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6- 완결

마지막 한 걸음 -3-

대회는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입구까지 빡빡하게 들어찬 사람들이 이 대회에 대한 기대치를 표현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서율의 안내를 받아 단상 위에 앉아 자신이 출품할 예술품들을 가지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아-. 아-.”

마이크의 볼륨을 조절하는 서율의 목소리를 듣자 곧 대회가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율은 단상에 서서 마이크를 조절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집중을 이목 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 아-. 하는 그 두 글자로 서율이 이 대회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서로의 잡담을 멈춘 채 서율이 서 있는 단상에 집중했다.

“먼저 이 대회를 찾아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회사는 대한민국에서 경매를 전담으로 하는 회사입니다. 주로 예술품과 공예품을 경매를 하고 있으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중, 아시아의 대표적인 무역 국가이자 젊은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 그리고 국민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는 이 싱가포르에 진출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진출의 첫걸음으로, 저희 회사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번 대회. ‘아트 오브 콜로세움’을 준비했습니다. 저희 회사의 심사를 거친 총 여덟 명의 예술가들이 만든 공예품들을 동시에 경매하여, 제일 높은 값을 받는 참가자가 우승을 하게 되는 이번 대회.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서율이 말을 마치자, 관중들이 우렁찬 소리로 박수를 쳤고, 어두웠던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었다

“대회 방식은 출품한 물건들을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동시에 경매하는 것으로 합니다. 최고가를 기록한 예술품에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며, 최고가를 경신한 후에 십 분이 되도록 추가 입찰이 없으면, 낙찰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시간은 총 두 시간으로 진행되고,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대상을 받게 되고, 저희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후에 이 곳 싱가포르에 준비되어 있는 저희 회사가 매입한 건물에 지은 공방에서 예술품을 만들게 됩니다.

과연 대상은 어떤 예술품이 수상할지. 예측해보는 것도 흥미롭겠습니다. 자. ‘아트 오브 콜로세움’ 시작하겠습니다. “

여러 개의 예술품들을 동시에 진행하다는 것은 꽤나 신선하고, 파격적인 경매방식이었다. 자칫하면 수많은 경매인들의 의견을 동시에 수렴하지 못해 경매에 혼선이 생기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인해 경매 특유의 고매한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었지만, 서율의 치밀하게 계획된 직원들의 동선과 좌석의 배치, 정해진 틀에 의존하기보다는 실시간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대회장을 조율하는 서율의 일처리 덕분에, 활기차면서도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 준법정신이 투철한 싱가포르인들의 성격 덕분인지, 과열된 분위기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불상사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회장 가득한 인파에도 불구하고,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그 모습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회는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여기저기서 경매품의 숫자와 입찰가를 적어놓은 팻말이 수없이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고, 다시 치솟아 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 작품은 꾸준하게 경매가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꽤 유명한 액세서리 회사도 적지 않았는데 이 모습을 세리가 봤다면, 그녀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하는 것도 꽤 큰 즐거움이었다.

예술품이 최고가를 기록하고, 십 분간 추가 경매가 없으면 낙찰되는 형식으로 진행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경쟁하는 예술품들이 줄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세 개의 예술품들이 경쟁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먼저 낙찰된 예술품들도 적지 않은 값을 받았기 때문에, 먼저 단상을 내려간 제작자들의 표정이 어둡지 않다는 것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현재 내 ‘밤하늘’은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세 개의 작품들의 가격이 큰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입찰로도 서로의 순위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가져온 멀라이언 조각상을 손에 쥐고 세리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간절하게 대상을 원했다. 

멀라이언 타워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던 세리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어디선가 큰 환호성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여기저기에 치솟아 있는 팻말들을 확인해보았다.

대회장의 오른쪽, 거의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팻말이 보였다. 팻말에는 ‘밤하늘’의 번호와 이십 만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먼 거리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가느다란 팔목이 보이는 걸로 봐서 아마 입찰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이십만 싱가포르 달러. 한국 돈으로 일억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와 동시에 최고가를 기록한 경매품에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밤하늘’이 달려있는 나뭇가지로 향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밤하늘’이 영롱하게 빛났다. 검은색의 천이 깔려 있는 테이블 위에서 자그마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본 사람들의 눈빛이 빛났고, 누군가가 치기 시작한 박수와 함께 회장의 분위기에 불이 붙었다.

결국 한 시간 반 만에 대회가 종료되었다. ‘밤하늘’은 삼십만 달러를 기록했다. 예상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받았다는 것에 놀랐고, 내가 결국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에 더욱더 놀랐다.

삼십만 달러를 입찰한 곳은 유명한 액세서리 회사였고, ‘밤하늘’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리와 함께 싱가포르에서 살 수 있어.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눈물이 흘렀다.

최종 낙찰을 받은 입찰자가 단상에 오르고,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나는 입찰자와 악수를 하고, ‘밤하늘’이 담긴 상자를 건넸다. 다시 한번 박수가 쏟아졌고, 서율이 나와 입찰자와 나의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경매가 끝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열을 지어 천천히 경매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진기사가 다양한 컷을 요구하는 바람에, 위치를 옮겨가며 꽤 오랜 시간 사진을 찍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입찰자에게 세리에게 원본을 돌려주고 싶은 내 사정을 설명했고, 입찰자는 아쉽긴 하지만 제작자의 마음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좋아. 모든 것이 해결됐어. 세리야. 함께 이 곳에서 영원히 살자. 

왠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줄리아가 가져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다시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나는 입구 근처에 세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꽤 먼 거리지만 세리가 확실했다. 아침에 모텔을 나설 때 입었던 흰색 티셔츠와 조금은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서글픈 눈매를 하고 있었다. 세리와 나의 눈이 마주치고, 세리가 등을 돌려 경매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단상을 내려가자 단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며 무언가 말을 했지만, 개의치 않고 사람들을 해쳐나가며 세리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가득한 인파를 빠르게 뚫고 나가자니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리가 사라지고 난 후였다.     

북 콘서트가 끝나고, 담당자의 차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도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이 켜지기 시작하면서 밝고 따뜻한 노란빛을 점점이 뿌리고 있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담당자는 속력을 냈다. 빠르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도중에, 나는 담당자에게 물었다.

“담당자님. 창문을 열어도 될까요?”

“아. 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문득 싱가포르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조용했던 실내. 어두운 도로가에 줄지어 선 가로등과 야자나무들. 질서 정연하게 도로를 달리던 차량들. 무엇인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

“멋진 말씀들 많이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지난 이야기들인데요.”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지난 이야기들.

“이번에 싱가포르를 가시는 것도 음….”

“아마 세리는 싱가포르에 없을 겁니다. 꽤 오래됐었고, 세리가 처한 현실은 꽤 가혹했으니까요. 싱가포르는 성공한 외국인들이 살기는 좋은 동네지만, 그 당시 세리 같은 사람들이 오래 살기는 힘든 나라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차가 조용히 도로를 질주했고, 나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세리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그녀의 피부가 구릿빛이라는 것만 기억났을 뿐, 나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비행기는 밤 열 시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아름답고 친절한 항공사 직원들과 여행에 들뜬 사람들. 조금은 낡았지만 깔끔하고 정돈된 분위기의 창이공항.

래플즈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직원들을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나를 알아보는 직원은 없었고, 기록을 살펴보던 직원이 내가 옛날에 투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다.

그래. 여기 온지도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세리의 밝았던 얼굴에 뿌옇게 안개가 끼어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호텔 직원을 따라 방에 짐을 풀고, 바로 롱 바로 이동했다. 싱가포르 슬링은 여전히 맛이 같았다. 그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고,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땅콩 껍질을 까면서 아까 북 콘서트에서 받았던 질문을 떠올렸다. 나는 결국 서율의 방식을 따랐고, 그 사실로 인해 세리는 상처받았고 나를 떠났다.

그 날 이후로, 세리는 웃는 일이 없었다. 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 그 사실이 세리가 나에게 가지고 있던 그 단단한 믿음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트려버렸고, 나는 그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에 베였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은 우리를 위한 일이었다고 변명하기 바빴다.

싱가포르 슬링 세 잔, 블랙 러시안 두 잔을 비웠다. 술기운이 오르는 중에 가게 마감시간이 다 되어 롱 바를 나섰고, 왠지 오늘은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을 느끼고 택시를 타고 클락 키로 향했다. 

클락 키는 여전히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다양한 인종들이 술잔을 비우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인들이 서로의 살결을 쓰다듬고 있었고, 누구도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나는 문득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서로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서로를 영원히 믿을 수 있나요.

길을 걸었다. 길을 걷는 발걸음이 자꾸만 비틀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기는 한 밤중에 클락 키였고, 싱가포르는 열기의 도시였으며, 나는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리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한참을 강변에 앉아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은 신기한 힘이 있었다. 굳어 있던 마음이 흐르는 물결처럼 흐르고,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신비로운 힘.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술이 더 마시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서율과 세리, 그리고 내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소용돌이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싶었다. 조용한 바에서 누군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바에서, 젊은 여인의 꿈이 담긴 노래를 듣고 싶었다.

담배를 피우자 시야가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변한 것은 단지 내가 술에 취한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리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세리가 너무나 보고 싶었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나의 잘못을 속죄하고, 다시 한번 그녀와 함께 미래를 꿈꾸고 싶었다. 모든 것이 필요 없었고 

단지 세리만이 내 곁에 있으면, 다시 한번 꿈꿀 수만 있다면.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클락 키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가 조용해져 있었고, 길거리를 걷는 인파가 한산해져 있었다. 모두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돌아갈 곳이 있는 것처럼 바쁘게 걸었다.

나는 바쁘게 걸을 필요가 없었기에 천천히 걸었다. 갈 곳이 없었고,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에 북 콘서트를 진행하기로 하면서 출판사에서 사준 구두가 내 발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잠시 아픈 발을 쉴 만한 곳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보였고, 가게들을 살펴보던 내 눈이 커졌다.

한글로 ‘밤하늘’이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시작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온몸에 힘을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뿌옇던 시야가 더 뿌옇게 변했고, 구두가 덜그럭거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세리의 얼굴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 커다랗던 눈망울,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긴 머리칼.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오물거리던 자그마한 앵두 같은 입술. 그녀가 자주 입던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 내가 사주었던 꽃무늬가 가득한 흰색 원피스. 그녀가 귀에 걸고 있던 ‘밤하늘’과 그녀가 부르던 노래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짙은 검은색의 통유리 너머로 피아노로 보이는 짙은 음영이 보였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창문을 등지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있던 곳은 네 개의 계절을 가진 아름다운 반도     

문틈으로 음표가 흘러나왔다. 울음이 격해졌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고 선채로 하염없이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문득 정신을 차리자 노래가 끝나 있었고, 나는 눈물로 가득한 얼굴로 문고리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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