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

질감이란 무엇인가

by Jack Kim

남자는 한동안 '혼종'을 자랑하고 다녔다. 그동안의 그림들을 보고 별 감흥이 없던 사람들도 남자의 '혼종'을 보고 마음에 들어했다. 괜찮은 그림이네.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그림이 남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술학원에 배치된 교본 책에 수록되어 있는 하나의 이미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낸 그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선은 모두 내가 그어낸거야. 남자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신이 쓴 '멀라이언 스노우볼'의 표지를 상상했다. 지금은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풀어낼 수 없지만, 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실력이 되면, 꼭 그리고 싶어. 그때는 더 행복하겠지. 남자는 욕망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꽤 어려운 그림을 드릴거에요."

선생님이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했기에, 남자는 긴장했다. 지금까지의 그림도 너무나 벅찼고, 절벽끝을 오르는 느낌으로 겨우 겨우 올라왔는데,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그림을 준다는 것인가.

"주전자에요."

선생님이 그림을 보여주었다. 음. 겉보기에는 크게 어렵지 않아보였다. 이미 남자는 명암을 어느정도 터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게다가 하나의 개체라니. 나는 얼마전에 세 개의 개체를 이어서 그렸다고.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주전자를 깔보고 있었다.

"자. 오늘은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을 거에요. 시작해보세요."

...??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선생님은 늘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에 대한 포인트나, 간단한 요령같은 것을 가르쳐 주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질이 없다니. 남자는 입맛을 다시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정말 어려운 그림이었다. 비록 주전자 하나지만 손잡이는 두꺼운 부분과 얇은 부분이 있었고, 빛을 많이 받는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뚜껑 위에는 동그란 원과(남자는 지금까지 이렇게 동그란 원을 그려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과도 완전한 둥그런 형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주둥이 부분. 그리고 바닥 부분의 검정색 부분. 그리고 단순한 명암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히 배웠던 것 같지만...습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남자는 중도 포기에 이르렀다.


"선생님."

"네."

"이 그림 너무 어려워요. 정말 못 그릴 것 같아요."

선생님이 방긋 웃고는, 옆으로 다가왔다.

"성호 씨는 늘 그랬어요. 어렵다고는 했지만 해냈죠. 사실 성호씨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은 하나도 쉬운게 없어요. 처음에는 다 어렵답니다."

선생님이 남자의 옆에 와서 연필을 잡고, 원본의 그림을 짚어주었다.

"자. 이 그림에는 지금까지 성호 씨가 그려온 그림과는 다른 점이 있어요. 뭘까요?"
"글쎄요..저도 뭔가 다르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보통 '질감'이라고 불러요. 그 물건의 어떤..표면의 느낌 같은 것이죠. 손잡이 부분은 아마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주전자일거에요. 철보다는 조금은 까끌까끌하겠죠. 몸통은 아마 철로 된 부분일거구요. 좀 더 매끄럽고, 빛을 많이 받겠죠. 이제 이런것을 표현 하실 때가 된거에요."

질감. 남자는 단어를 곱씹었다. 포면의 느낌. 남자는 아침에 먹던 오렌지의 껍질을 떠올렸다. 약간은 우둘투둘하면서도 매끄러운 그 표면. 자그마한 크레이터가 수없이 나있는 그 껍질.

"질감은 표현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에요. 프로 화가분들도 가끔 질감에 따라 애를 먹기도 해요. 물론 명암도.

이것은 제가 설명하기 힘든 거에요. 그저 성호씨가 보고 느끼는 수 밖에 없어요."

선생님은 잠시 남자와 눈을 맞췄다.

"어렵지만, 분명히 해낼 수 있어요."


남자는 또 미술학원을 한 주 쉬었다. 지난번 벽돌 이후로, 남자는 막힐 때면 한 주 쉬는것이 으례 행사처럼 느껴졌다. 쉬면서, 남자는 다시 한 번 일상에서 만나는 물건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특히 철과 플라스틱을 관찰 했는데 평소에는 무심하게 지나갔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철이 이토록 매끄럽고, 얼굴이 비췰만큼 반들반들 했을 줄이야. 남자는 국자에 비추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심 감탄했고, 가끔식 만나는 거친 플라스틱의 질감에 놀랐다. 반들반들하면서도, 사람들의 손길을 타 조금은 거칠어진 특유의 느낌. 남자는 손으로 계속해서 철과, 플라스틱을 문질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질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쉽게 그리는 레벨에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자는 당장은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남자는 좀 더 본질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표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보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것은...남자는 그림 그리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문답 같다고 느꼈다. 남자는 선문답에서 답을 찾은 적은 없기 때문에, 너무 깊은 생각으로 빠지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남자는 처음으로 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림을 완성했다. 여태껏 배운 기술로 모작을 했지만, 그것에서 얻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질감'에 대한 이해도가 100이라고 하면, 약 50 정도만 얻은 상태일까. 남자는 많이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분명 질감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 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은 앞으로 나아갈 때니까.


주전자.jpg


남자는 완성한 주전자 그림 오른쪽 위에 이름을 쓰고, 날짜를 적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과, 배, 그리고 완두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