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형태의 표현

by Jack Kim

남자는 주전자를 그리고, 다소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림을 그려내었고, 그림도 괜찮았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복싱으로 비유하자면 지금까지 쾌조의 KO승을 달리다가, 포인트 위주의 판정 승을 한 기분이랄까(남자는 결코 포인트 위주의 판정 승의 경기를 비하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남자도 옛날에 잠시나마 복싱을 취미로 한 사람으로써 포인트 위주의 판정 승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다만 KO승 특유의 상쾌한 맛이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남자는 뒤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무언가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매우 불편했다.


그 탓일까. 남자는 미술학원을 몇 번이나 쉬었다. 그 즈음 남자의 일상이 바빠진 것도 사실이었으나(이직을 하고, 연애에 문제가 생기는 등) 일 주일에 한 번 미술학원을 갈 틈 정도는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왠지, 처음 그림을 완성했을 때부터 느끼던 보람과 열정은 많이 식은 것이 사실이었다.


몇 번 정도 미술학원을 빠졌던 남자는, 언젠가 마음속에서 어떤 마음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사물을 관찰 하는 것처럼, 그 마음을 천천히 관찰 해 보니 그것은 의무감이었다. 의무감이 점점 자라나, 남자의 마음을 가득 채울 무렵에, 남자는 처음으로 호기심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미술학원을 찾았다.

아직 약속 했던 8주가 다 지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난 번에 주전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 한 것에 대한 찝찝함을 빨리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시작 된 것일까. 남자는 여러가지 추측을 해보았으나, 의무감이 자라난 토양의 정체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남자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은 이제 안나오는줄 알았다며 웃음으로 인사를 받아주었고, 남자는 쑥쓰럽게 웃었다.

"그만 둘 생각은 없었는데...그저 좀 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셨군요.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오늘 선생님이 가져온 그림은 장미였다. 남자가 지금까지 보고 그린 그림중에는 제일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아름답네요. 멋져요."

"그렇죠. 그만큼 어려우시겠지만, 이번에도 해낼 수 있으실거라 믿어요."

남자는 투덜거렸다.

"늘 저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만 주시는거 아닌가요."

선생님은 방긋 웃었다. 선생님이 남자를 교육 시키는 방법은 마치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스스로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다.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남자에게 따로 조언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선생님의 조언이 없는 만큼 더욱더 장미 그림을 자세히 살필 수 밖에 없었는데, 확실히 아름다운 그림이었으나 난이도가 아주 높아 보였다.

왼쪽의 꽃 부분은 여러개의 꽃잎이 합쳐져 있고, 각각의 모양이 달랐다. 빛을 받는 부분과 안받는 부분의 명암의 정도도 어둡고, 밝고, 그 중간과 그 중간 등. 아주 많은 단계가 있어 상당히 많은 시간과 높은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 밑의 꽃을 받치는 부분과, 가시가 여기저기 돋은 줄기, 그리고 이파리까지. 남자는 만약 이 그림을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하게 배운다면 전보다 실력이 훨씬 향상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장미를 완성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나 꽃잎을 그렸다 지우고, 이파리를 그렸다 지우고, 줄기를 그렸다 지웠다. 남자는 장미 그림을 그리며 연필과 지우개를 몇 번이나 다듬었는지, 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주전자와는 다르게, 장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었지만, 장미의 형태가 늘 흐릿했던 주전자의 이미지보다 남자의 머릿속 이미지에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자는 계속해서 배워나갔다.명암과 원근감, 그리고 형태. 그 중에 남자가 제일 주목한 것은 형태였는데. 꽃잎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었고, 자연은 일정하지 않았다. 꽃잎들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고, 이파리의 수맥들은 예상할 수 없는 곳들로 뻗어 있었다.

남자가 장미를 완성했을 무렵에는, 확실히 남자는 달라져 있었다. 약 삼 주 동안의 장미를 그리는 과정에서 남자는 아주 명확하게. 한 단계를 올라섰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들의 모든 것들이. 눈에 띌 정도로 명확하게 늘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호씨도 어느덧 8주가 끝나가네요."

"네?"

남자가 장미를 완성한 날. 선생님이 알려준 사실이었다. 남자는 이제 2주만 더 나오면, 8주 과정이 끝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일반적으로는 마지막 2주 동안은 인체의 얼굴이나 손과 발등을 그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이제 때가 됐다고 느꼈다. 남자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때가.

"선생님. 그러면...제가 그리고 싶은 인물이 하나 있는데요. 그걸 그려도 괜찮을까요?"

"좋죠. 그러면 다음 시간까지 그 인물에 대한 사진을 가져오시거나 핸드폰으로 찍어오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을 생각했고, 정말 그 인물을 완성할 수 있다면야.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인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열정과 호기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완성한 장미 그림 오른쪽 상단에 이름과 날짜를 적고 싸인을 남겼다.


장미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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