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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08.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2-

한 걸음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 -2-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정확히 흘렀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나의 인생은 아직 한 걸음을 떼지 못한 인생이었고, 나날들.

작품은 그런 나날들 속에서 완성되었다. ‘부서진 심장은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완성한 작품이었다. 붉은 루비를 조심스럽게 조각낸 후, 접착제로 운석의 일종인 기베온을 둥그렇게 가공한 판에 단단하게 붙였다. 목에 걸 수 있는 체인도 마찬가지로 기베온 운석으로 제작했다. 대기권으로부터 강렬하게 새겨진 기베온 특유의 무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났다.

우주로부터 지구로 떨어지며 고통 속에서 불순물들을 불태운 고결하고 순수한 기베온 운석이 남자의 부서진 마음을 받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한 물건이었다.

     

부서진 심장이 완성이 되고 나서, 나는 다시 한 걸음을 떼려고 노력했으나, 아직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남자에게 이 작품을 전해주고, 그 한걸음에 대해서 토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도, 남자는 공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정확히 두 달째, 남자가 다시 찾아왔다. 한 밤중에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조용히 문 앞에 섰다. 모습을 숨겼지만, 나는 그가 의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창고에 들어가 부서진 심장이 담긴 상자를 꺼내고 문을 열었다.

저 쪽 소나무숲 사이에 인영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상자를 문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문을 닫았다. 잠에 들기 전에, 몇 번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에 문 밖을 확인 했을 때,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상자를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창고에 넣고, 그 남자가 한 걸음을 내딛고 내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반 년 정도가 지났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계절이 지나고 바뀌어 의뢰인이 찾아왔던 봄에서 꽃피워 냈던 생명력들이 이제 스러질 때를 알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을이 되었다. 그 가을에. 누군가가 가을 밤중의 귀뚜라미 소리를 뚫고 내 공방을 찾았다.

무거운 나무문이 힘겹게 열리고 등장한 것은 편한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젊은 여자였다. 아마 내 나이의 또래거나, 나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였다. 하얀 피부에 검고 긴 생머리가 돋보였다.

여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주 예쁘다.

여자는 온갖 세공 도구와 각종 재료가 널려 있는 공방을 둘러보았다.

멋진 공방이네요.”

여자가 활짝 웃었다. 아름답지만, 다소 인위적인 느낌의 미소였다. 그 인위적인 느낌이 왠지 모르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온 몸의 신경이 저 여자를 경계했다.

여자 혼자 이 어두운 밤을 뚫고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오늘은 누구와도 약속이 되 있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시죠?”

사람을 좀 찾으러 왔어요.”

나는 잠시 여자를 응시했다.

?”

여자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혹시 여기 위스키 있나요?”

라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난번에 남자가 남기고 간 위스키 병을 찾아왔다. 여자는 질문 하나를 덧 붙였다.

얼음과, 레몬도 있나요?”

나는 놀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왔던 의뢰인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얼음과 슬라이스 된 레몬을 꺼내 여자에게 가져다주었다.

얼음 두 개. 얼음이 잠길 정도의 위스키. 그리고 그 위에 슬라이스 된 레몬.

여자는 술을 입에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입을 댄 여자는 천천히, 한 번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으-. 하는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양 손과 다리를 모으고는 부르르-. 하고 떨었다.

최근에 혹시 누군가가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나요?”

나는 잠깐 움찔했다. 여자가 말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말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이곳은 공방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죠.”

여자는 아직 의뢰인과 무슨 관계인지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

여자가 웃었다. 여자의 미소가 거미를 연상시켰다. 저 여자는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내가 걸려드는 순간 그녀는 원하는 것을 취할 것이다.

최근에 어떤 한 남자가 와서 의뢰를 하고, 물건을 아직 안 찾아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부서진 심장을 보관해둔 창고로 눈이 돌아갔다. 아차. 나는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나를 보고 웃었다. 인위적인.

모릅니다.”

제 아버지에요.”

. 나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분명 여자는 의뢰인을 닮았지만,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어디 있죠? 어디 있어요!”

갑자기 여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깜짝 놀랄 만큼의 속도로 창고로 돌진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양 팔을 뻗어 여자를 안아주었다.

여자의 머리가 내 품에 안겼다. 여자의 달큰한 숨이 내 가슴을 타고 올라와 턱을 간질였다.

.”

한참을 내 품안에서 숨을 고르던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빛에 여자의 얼굴이 비췄다. 검정 마스카라가 눈물에 번져 여자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몽환적이면서, 아름다웠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순백색의 티셔츠를 벗자 여자의 가슴이 드러났다. 새하얀 색의 젖가슴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흰색의 보름달을 닮은.

여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커다란 눈 속에 가득한 욕망과, 그 욕망에 수없이 나 있는 자그마한 공허의 크레이터가 보였다. 태워지지 못한 불순물이었다.

안아줘요.”

나의 아래로 새하얀 손이 뻗쳐올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여자가 돌아간 지 며칠이 지났다. 여자가 남긴 작업용 티셔츠에 남긴 눈물자국은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지워졌다. 다만, 내 가슴에 더 깊이 남은 것이 있었다.

여자였다. 여자가 내게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여자의 조각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여자가 흘린 눈물이 떠올렸다. 여자의 하얗고 풍만한 가슴이 떠올랐다. 어디서 온 여자일까, 무엇을 하는 여자일까.

여자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 감정이 사랑일까.

나는 그 여자가 조금 궁금해졌다. 여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울창한 숲의 한 가운데에 있는 공방에서, 나는 담배를 피면서 문득 여자가 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이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여자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달이 휘영청 뜬 한 밤중에 다시 찾아왔다.

다시 왔군요.”

여자는 고개를 꾸벅 하고는,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나는 작업 중이었던 도구들을 내려놓고, 천장에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잔을 잡는 여자의 새하얀 팔이 울긋불긋했다. 조심스런 표정으로 여자의 팔을 흘깃 흘깃 바라보는 나에게 여자가 말했다.

오는 길에 모기한테 좀 물렸어요.”

여자는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장에서 물파스를 꺼내 여자에게 발라주었다.

여기도.”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내게 의도적으로 가슴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가슴에는 붉은 곳이 없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물파스를 여자에게 건네주고 다시 작업대로 돌아갔다.

이 여자는 자신의 무기의 위력을 알았다. 혈기가 넘치는 젊은 남자인 나에게는 확실하게 치명적인 무기였다. 나의 눈은 그녀를 외면하려 애를 썼지만, 상상력은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뇌쇄적이어서, 곧 내 육체를 지배할 것만 같았다.

왜 그때 나를 안지 않았죠?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긴 뭐하지만. 나 꽤 괜찮은 외모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여자의 질문이 나를 다시 현실로 이끌어내었다. 나는 나무 조각용 끌을 잡고 대답했다. 여자를 좀 더 외면하고 싶었다.

당신의 눈에 새겨져 있는 자그마한 공허의 크레이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무 조각에 끌을 들이댔지만, 긴장한 탓인지 매끄럽게 나무를 깎아내지 못했다. 결국 나는 끌을 내려놓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공허는 아주 위험합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의 아버지에게로부터 배웠죠. 당신과 결합 하는 순간 나는 공허를 향해 끝없이 달려갈 것 이고.”

그때였다. 반짝-. 하고 내 머릿속에서 순간 빛나는 조각이 있었다. 조각이 섬광이 되어 내 영혼에 메아리쳤다. 영감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를 넘나들었다. 나는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펜과 종이를 찾았다.

불안한.”

나는 떠오른 이미지를 휘갈겨 썼다. 두 명의 연인이 있다. 그 둘은 욕망과 공허로 서로를 에워싸고, 달려들고, 파괴한다. 파멸로 향하는 한 쌍의 사랑스러운 연인. 바로 이거였다. 나는 종이를 들고 웃음을 지었다. 바로 이거야.

욕망을 남자로, 공허를 여자로. 둘은 서로를 휘감으며 파멸을 향한다.’

라고 덧 붙여 적은 후에, 나는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그것이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른 조각이 필요하다. 정말 마지막 조각.

나는 아쉬움에 찬 눈빛으로 공방을 돌아보다가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방금 전에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던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눈 안에 공허의 크레이터가 반짝이며 빛났다. 아름답게 빛나는 불순물.

나는 여자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딤으로, 내면 깊숙이 깊이 잠들어 있는 욕망을 일깨웠다.

욕망이 된 나는 그녀를 들고 방에 있는 침대로 움직였다.

여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목표가 되었다. 그녀의 내부는 나의 에너지를 끝없이 집어 삼켰다. 우리는 서로의 몸으로써 욕망을 채웠고, 공허를 나누었다. 우리는 하나의 뿌리로 시작하여 둘로 갈라지고, 다시 하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모든 힘을 다한 나는 사정했고, 그 순간 우주의 끝을 조금 보았다. 꿈틀거리던 욕망이 정제되고, 새로운 것으로 탄생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고, 나를 마주 보던 여자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듯 미소 지었다. 조금은. 인위적인 미소였다.

     

다음 날, 아침에 여자는 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명함 하나가 작업대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명함을 소리 내어 읽었다.  

명함 뒷면에는 차장 김서율이라고 적혀있었다. 서율. 나는 여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서율. 서율. 서율.

당장이라도 서율을 다시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명함을 주머니에 잘 갈무리 해두고 창고로 향했다.

먼저, 욕망을 뜻하는 재료가 필요했다. 나는 선반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붉은 색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루비. 아니야. 진부해. 더 강렬한 재료가 필요했다.

나는 지난 번 해외에서 사온 파파라챠 사파이어를 떠올렸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리고 서율의 눈을 닮은 검정색.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그 검은 구멍. 오닉스가 적당할 것이다.

     

창고에서 돌아온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4B 연필을 꺼내 종이에 상세한 스케치를 시작했다. 욕망이 형상된 여자 한 줄기와, 공허가 형상화 된 남자 한 줄기가 서로를 얽매고 얽어 다시 하나의 존재로 합쳐져 무수한 가지를 뻗는 형상.

좋아. 이름은 연리지가 좋겠어. 이 반지를 서율에게 선물 하는 거야. 나는 미소 지었다.

스케치가 끝난 나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보석들을 아주 잘게 쪼갰다. 조각들로 나눠진 보석들을 조심스럽게 핀셋으로 집고 은과 금으로 디자인 된 반지 틀에 조심스럽게 붙이기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 한지 십 분 만에 눈의 시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질 것 같았다. ‘연리지의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휴식을 취하며 서율의 명함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연리지가 완성된 날. 나는 서율의 회사로 향했다.

     

무슨 일이시죠?”

서율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카운터에 서 있던 밤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가 내가 내민 명함을 한참동안 주의 깊게 관찰했다. 명함을 관찰 하던 시간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내 얼굴을 관찰한 여자가, 명함을 내게 돌려주고 말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서율의 방은 화려했다.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카펫, 벽에 걸려있는 몇 개의 이름난 보석 컬렉션들. 흑단나무로 만들어진 업무용 탁상까지.

입구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 서율이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심플하고 세련된 검정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는 마치 피부처럼 완벽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왔어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나는 매고 온 백 팩에서 조그마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서 서율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서율은 나무 상자를 탁상위에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를 열었다.

나무 상자 안에는 연리지와 조그마한 종이봉투가 들어 있었다.

아주. 멋진 작품이에요.”

서율은 상자에서 연리지를 꺼내 자신의 약지에 끼워 보았다. 오닉스의 검정과 사파이어의 파랑이 물결지어서 서율의 손가락 위에서 서로를 향해가고 있었다. 한참동안 연리지를 낀 약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상하던 서율이 그날처럼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처럼.”

검정 원피스가 파도처럼 물결치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조금 쉬다가 지하 일 층에 있는 경매장으로 오세요. 이번엔 내가 멋진 모습을 보여 줄 테니까.”

서율이 문을 닫고 나간 후,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옷을 주워 입으며 서율의 방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다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클림트의 유디트 I'. 곱슬거리는 흑발의 여인이 금 목걸이를 차고 황홀한(혹은 퇴폐적으로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드러낸 그림이었다.

여인은 드러낸 가슴과 허리는 관능적이었고, 게슴츠레 뜬 눈 안에는 짙은 팜므파탈이 가득했다. 남자를 빨아들이는 기운이었다. 여인의 오른손에 들린 검은색 머리가 혀를 빼물고 종말을 알렸다. 넌 끝났어. 넌 내게 벗어나질 못해.

어느 부분인지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서율과 닮았다. 라고 생각했다.

     

경매장은 아주 조용하면서도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오면 자신의 번호가 새겨진 번호판을 들고, 직원에게 조용히 금액을 말할 뿐. 어떠한 불필요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

이번 물건은 아프리카에서 온 물소 뿔 조각입니다.”

경매품을 소개하던 서율이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윙크를 날렸다. 나도 미소로 답했다.

서율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아프리카 특유의 야성미와 세심한 세공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뿔 가운데에 새겨진 사냥하는 모습의 역동성이 아주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물소 뿔은 약재로도 쓰인다고 하네요. 실용성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번호판이 들썩이고, 직원들이 분주해졌다. 나는 흥미를 느끼고, 직원에게 문의하고 남는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아주 말쑥했으나, 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나는 남자를 곁눈질로 관찰했다. 남자의 얼굴에서 뭔가가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로션, 혹은 선크림 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얼굴에서 나는 기름인가. 하고 관찰하던 나는 곧 깨달았다. 아니다. 저건 오만함이다. 나 이외의 다른 세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런 강철 같은 오만함이다. 나는 관찰하던 시선을 거두고 남자의 반대편으로 다리를 꼬았다.

물소 뿔이 어느 중년의 남자에게 낙찰이 되었고, 경매장은 박수로 가득 찼다.

     

경매가 진행됨에 따라 대기가 점점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감탄을 내뱉으며 번호판을 경쟁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등장합니다!”

잠시 경매장이 숙연해지고, 조명이 모두 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먹잇감을 기다렸다.

세련된 악세사리의 정점. ‘부서진 심장입니다!”

경악한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위의 사람들이 잠시 나를 쳐다보았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서율의 옆에 준비된 테이블에 조명이 집중되었다. 조명 아래 빛나는 목걸이. 분명 그것은 그의 목걸이였다. 저곳에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이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미얀마 산 루비 피젼 블러드가 운석의 일종인 기베온에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 아주 희귀한 디자인의 목걸이입니다. . 저기 이 제품을 만드신 작가분이 일어서 계시는군요.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서율의 그 재치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상처받은 내 마음위로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서율의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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