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장마

by 김채하

가을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일주일째 떠나지 않는다. 비 오는 와중에 작열하는 태양이 고개내미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따가움은 바뀐 절기를 이기지 못했다. 잠깐 비가 멎은날의 아침, 선선한 새벽의 공기가 코로 훅 들어오자마자 이제 곧 추워질 것임을 직감했다. 옷방에 두텁게 포개어진 여름옷 무더기를 세탁소에 맡기고, 두께가 있는 외투를 꺼내어 진열해야 했다. 또 거실과 안방에 하나씩 있는 선풍기를 세척해서 커다란 비닐에 봉인해야 했고, 여름 내내 신나게 틀어댄 에어컨 필터 청소도 필요했다. 음. 또 무엇을 해야 하나. 소파에 홀로 앉아 집을 빙 둘러봤다. 빗방울이 톡톡 창문을 건드리다가 어느순간 친구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커졌다.


“많이 오네…”


새벽 5시는 평화롭다. 보통 때라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근처 호수공원을 걸었을 텐데, 지금은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가을 맞이 청소 계획 세우기 밖에 할 수 없었다.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냥 비가 오니까. 또 다른 하나는… 그러니까 내가 지금 고작 청소 계획만 세우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집 안으로 들어올 것처럼 거세게 쳐대는 비가 정신을 차리라며 더 신랄하게 창문을 두들겼다.



성인 남자 허리까지 불어난 물. 불어난 것에 멈추지 않고 빠른 물살로 빠져나가는 물. 몸을 휘감는 물 소용돌이. 흙, 먼지, 나뭇가지 등 수만 가지 재료가 혼합되어 500원짜리 자판기 커피 색깔이 된 물.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쉰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하는 소방관들과 사방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마저 쏴아아- 하는 물 소리가 집어삼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멈출 줄 모르는 비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표현하는 재난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물살이 너무 세요. 이 지역 윗쪽에 있는 댐에서 수문을 개방해둬서 아래 하천은 거의 물을 들이붓는 수준이라고요!”

살던 곳을 떠나 이곳으로 배치된 지 1년도 안 된 민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말이었다. 방금 전 종아리를 때리던 물은 어느새 상체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를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무리한 인명 구조는 더 큰 사상자를 부른다는 입사 초기 교육에 따라 지금 여기서 철수해야 했다.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때마침 고립된 마을 사람들을 옮기던 소방대원이 머리 위로 크게 수신호를 보내자 모두 신속히 현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출처 모를 잡탕 같은 물도 허리를 가격해댔다. 파도치는 물은 잠깐씩 입으로, 코로, 귀로 들이닥치기도 하며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의지까지 보였다.


하나 남은 구명조끼를 챙겨 보트에 올라타려는 찰나, 나무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이가 민규의 눈에 들어왔다. 헛것을 보았나 싶었지만, 계속해서 자기를 바라보는 그 눈은 거짓일 리 없었다.


“야, 김민규! 보트 버리고 올라타라고!”

선임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살면서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최장신'이라는 타이틀도 자연의 텃세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몸이 휘청이고 때때로 발에 아무것도 닿지 않기도 했다.


“김민규, 미쳤어? 올라와!”

이번엔 다른 팀원이었다.


민규의 얼굴에 철썩철썩 붙는 빗방울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넋 놓고 서 있는 민규가 얼굴을 쓰윽 훑어 빗물을 거두었으나 곧장 다시 달라붙어 흘렀다. 그때 여럿이 우악스럽게 민규를 잡아당겼다. 보트가 빗물에 넘실거렸다. 그리고 민규는 중심을 잃고 첨벙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여전히 나무 위에 있었고, 희망 없는 얼굴이었다. 그 나이대에서 나올 수 없는 삶을 포기한 아이의 얼굴. 딱 그것이었다. 그러자 오로지 조난자만을 위해 멋지게 헤엄치는 소방관이 아니라는 게 부끄럽기까지 했다. 민규는 자신의 눈동자에 맺혀 서있는 아이를 모른체할 수 없었다. 결국 잡힌 멱살을 툭 떼어내고 나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동료의 눈에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이 차도인지, 인도인지, 공원 의자 위인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 아직 발이 닿긴 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민규는 오른발가락 끝을 땅에 튕겨 추진력을 얻었다. 좁은 곳을 빠져나가는 물살은 빠르고 거침없었지만, 아이가 있는 나무쪽으로 몸을 던지며 한번 더 헤엄쳐 나갔다. 맨몸으로 수영을 하며 호흡을 위해 머리를 잠깐씩 빼냈을 때, 아이는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귀가 멍멍했다. 눈이 따가웠고, 콧속으로는 작은 모래알 섞인 물이 들어왔다. 동료들의 목소리는 이제 더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잠이 들었나보다. 뉴스속보 소리에 급히 눈을 떴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으며, 내리는 비의 양도 변함 없었다. 민규 동료의 증언으로 재현된 마지막 장면은 오롯이 상상력에 의존한것이었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꿈에서 초고화질로 상영되었다. 도대체 이 영화의 필름은 언제쯤 끊어질까. 오랜기간 이어지는 상상은 결국 실재하는 일로 굳어버려 착각을 일으킨다. 꿈에서 민규는 실제보다 더 처연했고, 결연했으며 그가 떠내려가는 장면은 그 어떤 영화보다 현실적인 연출로 완성되어 있었다.


여름 장마 내내 불면과 악몽에 교차로 시달렸고, 바람이 시원해지자 홀로 기뻐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 가을맞이 비소식에 또 한번 보기좋게 휩쓸렸다. 이후 적막을 깨는 뉴스 속보 기상캐스터의 말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예고 없는 비에 많이 놀라셨죠? 당분간 이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것은 동쪽 기압골의 영향으로…’


올가을 장마가 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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